다른 단체에 비하여 비교적 젊은 회원들로 출발하였다. ‘실천과 이론을 통하여 신극 수립의 일석이 되자’는 취지 아래, 1938년 2월 동아일보사 주최 제1회 연극경연대회에 셰익스피어 원작 「햄릿」 가운데 진우촌(秦雨村)이 번안한 ‘묘지(墓地)’ 장면으로 창립공연을 가졌다.
당시 연출은 김욱(金旭), 장치는 이병현(李秉玹), 연기자는 최운봉(崔雲峰)·유일준(兪日俊)·송재로(宋在魯)·박학(朴學) 등 모두 신인들로서 연극의 참신함을 보여 주려고 하였으며, “일기당천(一騎當千)의 패기와 정열을 상징하던 극단…… 그 해 연극계의 커다란 수확”이라는 평을 받았다.
같은 해 9월김욱 연출, 이병현 장치로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을 공연하였다. 1939년 3월 동아일보사 주최 제2회 연극경연대회에 박향민 작, 김욱 연출의 「상하(上下)의 집」으로 참가하였으며, 4월에 한상직(韓相稷) 작 「승무도(僧舞圖)」, 진우촌 작 「바다의 남편」, 9월에 무라야마(村山知義) 작 「아편전쟁」과 「배영신문(排英新聞)」 등을 공연하였다.
이 밖에 「지열(地熱)」·「태양의 아들」 등 반민족적 작품과 함께 「낙랑공주」·「항구의 노래」 등으로 지방을 순회하였으나, 제10회 공연 예정이었던 「월사금(月謝金)」은 공연금지를 당하였고, 1940년 11월에 조선총독부의 연극단체정비시책에 걸려 해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