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환 ()

김정환
김정환
연극
인물
중앙국립극장 무대과장, 서울시 문화위원 등을 역임하여 우리나라 무대미술의 대표적인 인물로 평가되는 미술인 · 교육자.
이칭
문헌(文軒)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912년
사망 연도
197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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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중앙국립극장 무대과장, 서울시 문화위원 등을 역임하여 우리나라 무대미술의 대표적인 인물로 평가되는 미술인 · 교육자.
개설

호는 문헌(文軒). 한말 무관(武官)의 차남으로 출생하였다.

생애 및 활동사항

서울 휘문고등보통학교를 거쳐 1937년 일본미술학교 응용미술과에 입학, 1939년 졸업과 동시에 동보영화사(東寶映畫社) 미술과 촉탁으로 들어가 무대장치가로서의 수업을 쌓았다. 1940년 귀국하여 조선연예주식회사와 조선악극단의 미술부장으로 재직하면서 무대디자인 및 제작에 참여했다.

이에 앞서 1932년 고등보통학교 재학중 극예술연구회의 직속 실험무대에서 고골리의 「검찰관(檢察官)」 조명을 맡아 연극과 인연을 맺었다. 1942년 극단 고협(高協)에 관여한 이래 「빙하」·「아름다운 고향」·「무영탑」·「해당화 피는 섬」·「삼남매」 등의 장치를 맡았으며, 예원좌·약초악극단·반도악극단·신생극단·황금좌 등에서 악극 및 무용극의 장치를 담당했다.

광복과 더불어 서울무대장치소를 개설하여 운영하는 한편, 연극과 영화 양쪽에 활동의 폭을 넓혔다. 영화미술로서 대표적인 것은 고려영화사의 「자유만세」(1946), 대한영화사의 「밤의 태양」(1948) 등이 있다.

연극활동은 1947년 이래 신극협의회에 가담하여 극단 신협과 극협의 무대장치를 맡는 한편, 6·25전쟁을 전후하여 중앙국립극장 무대과장, 연극학회 간사,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 집행위원, 서울특별시 문화위원 등 폭넓은 활동을 하였다.

6·25전쟁 때는 극단 신협과 함께 피난하여 대구·부산을 내왕하며 무대장치에 전념하다가, 환도 이후 신협의 「원술랑」을 비롯하여 「다정불심」·「햄릿」, 그리고 국립극단의 「파우스트」 등에서 우수한 장치를 보여주었다.

이와 동시에 연극교육자로서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의 대우교수로 시작하여 동국대학교 교수를 역임하는 한편, 드라마센터 부설 연극학교·수도여자사범대학·상명여자사범대학·숙명여자대학·이화여자대학교 등에서 후진을 양성하였다.

또한 이 기간 동안 드라마센터의 건립설계에서부터 대다수의 무대장치를 도왔고, 미국 록펠러 재단 초청으로 1년간 예일대학 연극학과에서 연구, 구미연극계를 시찰하고 귀국했다.

1966년 예술원 회원에 선출됐고, 1967년 동아연극상(무대미술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1971년 병중에 국립극단의 「포로들」의 장치를 맡았으며, 1973년 드라마센터의 「초분(草墳)」의 해외공연을 위한 디자인을 남긴 채 사망했다. 그는 우리 나라 무대미술의 대표적인 인물로 평가된다. 번역서로 리글의 『예술미학론』이 있다.

참고문헌

『한국영화총서』(한국영화진흥조합, 1972)
「문헌김정환연구」(김흥우, 『연극학보』 10·11합집, 동국대학교, 1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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