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제주(濟州). 고신걸(高臣傑)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고봉지(高鳳智)이고, 아버지는 한성부판윤 고득종(高得宗)이다.
1451년(문종 1) 현감으로 증광문과에 정과로 급제하고, 곧 포천현감이 되었다가 사직하고자 하였으나 허락받지 못하였다.
같은 해 사간원우헌납이 되고, 1455년(세조 1) 좌익원종공신(佐翼原從功臣) 2등에 책록되었다. 정랑과 전라도 경력을 거쳐 1464년 청주목사가 되어 정사에 부지런하여 아전들은 두려워하고 백성들은 편안히 여겼다.
이듬해 삼포효유부사(三浦曉諭副使)가 되어 뇌거사목(賚去事目)에 의거하여 왜인들을 회유하였다. 1467년 성균관대사성으로서 특명으로 가선대부에 승진하고 주문사(奏聞使)가 되어 포로로 잡은 건주삼위(建州三衛)의 야인들을 북경까지 호송하여 돌려보내고 황제로부터 상을 받았다. 1470년(성종 1) 전라도관찰사가 되었으며, 1472년『예종실록』의 수찬에 참여한 공으로 말 1필을 하사받았다.
같은해 동지중추부사 겸 황해도관찰사가 되어 나갔으나 어머니가 늙었음을 이유로 곧 사직하였다. 1479년 첨지중추부사에 이어 한성부좌윤이 되었다.
이듬해 첨지중추부사로서, 제주도에서 진주앵무배(眞珠鸚鵡盃)를 바치자, 이것은 백성들에게 폐를 끼치는 것이라 하여 이를 금해줄 것을 왕에게 건의하여 허락받았다. 벼슬은 유수에까지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