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감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전기에, 도승지, 의정부좌참찬, 병조판서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차옥(次玉)
시호
양평(襄平)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423년(세종 5)
사망 연도
1487년(성종 18)
본관
안동(安東)
주요 관직
도승지|의정부좌참찬|병조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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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 전기에, 도승지, 의정부좌참찬, 병조판서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차옥(次玉). 아버지는 중추원부사 권극화(權克和)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444년(세종 26) 음보(蔭補)로 사직녹사에 등용되었고, 1450년 다시 사마시에 합격했다. 1455년 세조가 즉위하자 주부로서 좌익원종공신(佐翼原從功臣) 3등에 책봉되었다.

1467년(세조 13) 동부승지·좌부승지·도승지를 차례로 역임했다. 도승지 재임시 사사로운 일로 사헌부의 서리를 패초(牌招: 임금의 명을 받들어 신하를 부름)했다 하여 탄핵받았다. 그러나 세조가 간경도감을 설치하자 도감사(都監使)에 제수되었다.

1468년 예종이 즉위하자 경연참찬관을 겸했으며, 불사(佛事)에 매번 참석하였다. 또한, 남이(南怡)를 제거하고 예종의 즉위를 도운 공으로 추충정난익대공신(推忠定難翊戴功臣) 3등에 책봉되었고, 행승정원도승지로 서화천군(花川君)에 봉해 졌다. 또 자주 세조의 능에 가서 여러 일을 점검한 공으로 1계급 특진되었다.

이듬해 경상도 연해의 여러 읍에 기근이 심하게 들자 구황곡을 내어 이들을 구제하자고 청했다. 가선대부행승정원도승지 겸 경연참찬관·홍문관직제학·상서원정으로 공신포상 때 반인(伴人) 6인, 노비 8구, 구사(丘史) 3인, 전 80결, 은 25냥, 표리 1장, 내구마 1필이 하사되었고, 또 봉선사의 종을 만드는 데 공이 있다 하여 말 1필이 하사되었다.

1469년(성종 즉위) 청승습사(請承襲使)로서 북경(北京)에 다녀왔다가 1471년 순성명량경제홍화좌리공신(純誠明亮經濟弘化佐理功臣) 1등에 책봉되었고, 이듬해 대사헌이 되었으며, 1473년 판한성부윤이 되었다.

1474년 대전관(代奠官)이 되고, 돈체사(頓遆使)로 국장(國葬)에 공이 있었다 하여 말 1필이 하사되었다. 한성판윤으로서 경성 안 4면의 산기슭에 인가가 많아 풍수금기를 범하고 궁궐을 위압하니 풍수학 제조에게 살피게 하자고 상소했다.

1477년 판중추부사로 표(表)를 만들어 북경에 다녀왔으며, 1478년 의정부좌참찬이 되었다. 이듬해 원접사(遠接使)가 되었으며 1480년 안주좌참찬으로 평양선위사(平壤宣慰使)가 되었고, 이듬해 평안도체찰사를 거쳐 의금부판사가 되었으나 파면되었다.

1482년 경기도 진휼사를 거쳐 숭정대부에 오르고 1483년 병조판서가 되었으며, 다시 화천군에 봉해졌다. 1485년 전라도 진휼사로 나아가 민정을 살폈다. 문과 출신이 아니면서 도승지가 된 인물로 거론된다. 시호는 양평(襄平)이다.

참고문헌

『세조실록(世祖實錄)』
『성종실록(成宗實錄)』
『국조방목(國朝榜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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