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9년(세조 5) 무과 식년시 갑과(甲科)에 급제하였다.
1467년(세조 13) 부호군으로서 평안도순변사가 되어 야인들의 침입을 막았으며, 건주위(建州衛)를 정벌할 때 참여한 공으로 일자(一資) 승진되었다. 용맹을 갖추었으며 병기에도 밝아 왕이 선정전(宣政殿)에서 연회를 베풀 때와 보경당(寶慶堂)에 왔을 때, 김순명(金順命) 등과 함께 활을 만드는 법을 강론하였다.
1468년 평안서도절도사로 나갔다. 1470년 가선대부가 되고 행훈련원도정을 거쳐 영안남도절도사가 되어 나갔다가, 아버지의 노환으로 인해 사직하자 왕으로부터 의약품을 하사받았다. 그러나 영안남도에 곤충들의 피해가 많이 생기자 다시 절도사로 나갔다.
1475년 경기도절도사를 거쳐 조전장(助戰將)이 되어 인산(麟山)에 파견되었으며, 곧 동지중추부사에 임명되었다. 같은 해 남도절도사를 혁파하려는 왕의 뜻에 반대하여 혁파하지 말 것을 주장하였다. 1476년 평안도절도사로 다시 나가 이산(理山)의 막응개목책(莫應介木冊)과 벽동(碧潼)의 양경목책(兩梗木柵)을 혁파할 것을 청하였으나 반대에 부닥쳤다.
1479년 서모의 노비를 받은 것이 문제가 되어 단정하지 못한 사람으로 여러 번에 걸쳐 탄핵을 받았다. 1484년 호조참판으로서 천추절을 축하하기 위해 전(箋)을 가지고 명나라에 다녀왔다. 1487년(성종 18) 전주부윤을 역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