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민공동회 ()

근대사
사건
1898년 10월 28일부터 11월 3일까지 독립협회가 서울 종로에서 대소관민을 모아 국정 개혁안을 결의하고 이를 추진하기 위해 개최한 집회.
내용 요약

관민공동회는 1898년 10월 28일부터 11월 3일까지 독립협회가 서울 종로에서 대소관민을 모아 국정 개혁안을 결의하고 이를 추진하기 위해 개최한 집회이다. 독립협회는 가두집회를 거부하고 독립관에서 개최하자는 개혁파 관료들을 설득하여 종로에서 각종 사회단체와 일반 시민·학생 1만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민관 합동으로 「헌의육조」라는 개혁 강령을 채택하였다. 핵심 내용은 근대적 입헌정치의 실현이었다. 초기에 부정적이던 고종도 이 강령을 재가하고 국정개혁안을 담은 ‘조칙오조’를 내렸다. 하지만 수구 세력의 방해공작으로 입헌정치는 끝내 좌절되었다.

정의
1898년 10월 28일부터 11월 3일까지 독립협회가 서울 종로에서 대소관민을 모아 국정 개혁안을 결의하고 이를 추진하기 위해 개최한 집회.
역사적 배경

독립협회는 열강의 침탈로부터 국권을 수호하고 지배층의 압제로부터 민권을 수호하기 위해서는 국정 개혁에 의한 근대적 자강 체제(自彊體制)의 수립이 긴요하다고 생각하였다. 또한 근대적 자강의 실현은 관민의 협력으로써만 가능하다고 믿었다. 그래서 진보적인 관료들을 중심으로 개혁 내각을 수립하게 하고 민의를 반영할 수 있는 민선 의회를 설립해, 개혁 내각과 민선 의회의 협력을 통해 국정 전반에 걸쳐 근대적 자강 개혁을 추진하려고 하였다.

요컨대, 독립협회가 근대적 자강 체제의 수립이라는 궁극적인 목표를 위해, 국정 개혁안을 관민이 공동으로 선언하게 하고 이를 함께 추진해 나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만민공동회에 관인을 참여시킨 것이 관민공동회이다. 독립협회는 1896년 창립 이래 애국계몽운동을 벌여 국민들의 지식수준을 높이고 민력(民力)을 조성해, 1898년 3월에는 민중 대회인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를 개최해 민중의 근대적 정치운동을 표면화시켰다.

이후 독립협회는 민중의 힘을 배경으로 하여, 국권의 수호와 민권의 신장 및 국정의 개혁을 위한 여러 가지 운동을 전개하였다. 독립협회는 1898년 9월 김홍륙(金鴻陸)에 의한 국왕암살음모사건(김홍륙독차사건)과 이와 관련해 수구 세력에 의한 연좌노륙법(連坐孥戮法 : 죄인의 부자와 처까지 처벌하는 형벌)의 부활 책동을 계기로 하여, 정부 7대신의 탄핵 운동을 전개해 민중 대회의 힘으로 수구파 내각을 총사퇴시켰다. 민중의 힘으로 정권교체를 단행시킨 근대적 민중운동의 획기적인 승리였다.

10월 12일 수구파 내각이 물러가고 박정양(朴定陽)의 개혁파 내각이 구성되자, 독립협회의 제의에 따라 10월 15일에는 독립협회 대표들과 정부 대신들이 정부 청사에 모여 관민 협상을 벌여 의회 설립과 내정 개혁 문제를 협의하였다. 관민 협상은 관민공동회 개최를 위한 예비 회담의 성격을 띤 것이었다. 이와 같은 독립협회의 강력한 활동에 위협을 느낀 국왕은 언론집회를 단속하는 조칙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독립협회와 민중은 “만국에 평행하는 것은 폐하의 권리이며, 탄핵해 성토하는 것은 백성의 권리임”을 주장하면서, 시위와 농성을 통해 국왕의 언론 통제 조칙을 번복시켰다.

경과

독립협회는 언론 투쟁에서 승리한 여세를 몰아 국가의 당면 문제를 관민이 협의해 일괄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종로에서 관민공동회를 개최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10월 27일 정부 관료와 사회 각계 각층의 인사들에게 초청장을 발송하였다. 초청장을 접수한 정부측에서는 종로에서 대회를 여는 것은 가두집회를 금지하는 조칙에 위배되므로, 독립협회의 토론 장소인 독립관에서 대회를 열자고 주장하면서, 종로 대회에는 불참하겠다고 통고하였다.

독립협회는 정부측이 종로 대회에의 불참을 통고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10월 28일 예정대로 종로에서 관민공동회를 개최하였다. 독립협회의 회원들과 사회 각계각층의 시민들이 운집한 가운데, 독립협회 회장 윤치호(尹致昊)의 개회사로 대회가 개막되었으나 정부 대신들은 끝내 참석하지 않았다. 정부측에서는 대회 장소를 독립관으로 옮길 것을 거듭 주장하였다. 반면에 독립협회 측에서는 대회의 목적이 관민이 협동해 국가의 폐단과 백성의 질고를 제거하고자 하는 것이므로, 수도의 중앙인 종로가 합당하다고 주장했다.

이처럼 이날은 양측이 여러 차례의 서신을 통해서 자기 측의 주장을 전달했을 뿐, 대회를 진행시키지는 못하였다. 이튿날인 10월 29일 관민공동회 회중은 총대 위원 30인을 선정해 정부에 서신을 보내, “이번 대회는 독립협회 토론회가 아니고 관민공동협의를 위한 것이므로 독립관은 공동 처소가 될 수 없다”라고 재차 입장을 밝히며, 정부 대신들의 종로 대회장 참석을 강력히 요구하였다. 결국 정부측은 국왕의 양해 아래 대회 장소 문제를 양보하고 종로 대회장에 참석하게 되었다.

그래서 정부측에서는 박정양 등 현임 대신과 고관들, 그리고 민영환(閔泳煥) 등 전임 대신들이 참석하였다. 그리고 민간 측에서는 독립협회를 비롯해 황국협회(皇國協會) · 황국중앙총상회(皇國中央總商會) · 협성회(協成會) · 광무협회(光武協會) · 찬양회(贊襄會) 등의 사회단체와 일반 시민 · 학생 등 1만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관민공동회가 개최되었다.

이날 대회는 회장으로 선출된 윤치호의 취지 설명과 의정부 참정 박정양의 인사말로 시작되었다. 그런데 종래 가장 천대받던 재설군(백정)인 박성춘(朴成春)이 개막 연설에서, “관민이 마음을 합쳐 국가를 이롭게 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할 방도를 찾아야 한다.”고 호소해 만장의 박수갈채를 받았다. 종래에 통치의 대상에 불과했던 민중이 정부 대신과 함께 국정을 논한 것은 우리 역사상 일찍이 없었던 일이었다.

이어 참석자들의 국정 개혁에 관한 여러 가지 의견 발표가 있은 뒤, 국정 개혁의 기본 방향을 제시한 〈 헌의육조(獻議六條)〉라는 개혁 강령을 채택하였다. 참가한 대신들도 여기에 찬성의 서명을 하고 국왕의 재가를 받아 반포하기로 약속하였다. 그런데 이는 근대적 자강 체제 수립을 목표로 하는 독립협회의 국정 개혁 운동이 결실을 맺은 획기적인 사실이었다.

〈헌의육조〉의 내용은 국가의 자주 평등, 국가 주권의 확립과 국가의 이권 수호 등 대외적 자주권의 표방, 국민의 재산권 보장과 신체의 자유 및 정치 참여 등 대내적 자유 민권의 주장, 기타 재무 · 사법 · 인사 등 국가 행정의 근대화와 입헌 대의정치, 내각 책임 행정의 구현 등 근대적 자강 개혁을 강조한 것이다. 드디어 10월 30일 고종은 〈헌의육조〉를 재가하는 한편 더 나아가 중추원 설치, 신문조례 제정, 탐관오리 처단, 민폐 사항 처리, 상공학교 설립 등 민중의 요구에 부합되는 ‘조칙오조(詔勅五條)’를 내렸다. 이것은 독립협회와 민중운동의 일대 승리이며, 관민공동회의 성공을 의미한다.

10월 31일 이후로도 종로의 관민공동회는 계속되었다. 그것은 〈헌의육조〉의 실시를 위한 정부의 구체적 조처를 기다리고 이를 촉진하기 위해서였다. 11월 3일에 이르러 만민은 중추원의 의회식 개편과 〈헌의육조〉의 실시에 관한 정부의 확고한 다짐을 받고, 1주일간에 걸친 관민공동회를 성공적으로 끝마치고 해산하였다. 11월 4일 〈헌의육조〉의 실시를 위한 조처의 하나로 의회식 중추원 관제가 공포되었고, 박정양 내각의 통고에 따라 독립협회는 11월 5일에 중추원 의관의 반수인 25명의 민선의관을 독립관에서 선출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11월 4일 밤 조병식(趙秉式) · 이기동(李基東) 등 수구 세력은 독립협회가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정을 실시하려 한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렸다. 그리고 그들은 고종을 충동해 진보적인 박정양 내각을 전복시키고 독립협회를 혁파시켰다. 그 결과 실시를 눈앞에 둔 의회 설립도 좌절되고, 관민공동회의 궁극적 목표인 근대적 입헌정치의 실현도 좌절되고 말았다.

의의와 평가

관민공동회는 역사적으로 다음과 같은 의의가 있다.

첫째, 관민공동회는 민중 대회인 만민공동회에 관인이 합석해 성립된 우리 역사상 최초의 관민합동범국민대회로서, 만민공동회의 확대 혹은 발전의 형태였다. 종래 민중과 단절되었던 개화 운동이 독립협회의 애국계몽운동을 통해 민중과 최초로 결합해 만민공동회를 출현시켰으며, 만민공동회를 통한 민중의 개화 · 정치운동의 성장을 배경으로 하여 관민공동회가 성립될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만민공동회가 ‘개화’와 ‘민중’과의 결합을 의미한다면, 관민공동회는 개화 운동이 민중에 뿌리를 내려 민중적 차원의 개화 운동, 즉 근대적 민중운동이 확고한 토대를 닦게 된 것을 의미한다. 여기에 관민공동회 성립의 역사적 의의가 있다.

둘째, 관민공동회의 〈헌의육조〉는 대외적인 자주 국권의 수호와 대내적인 자유 민권의 신장 및 근대적인 자강 체제의 수립을 추구하는 포괄적인 국정 개혁의 강령이었다. 독립협회는 민중의 힘을 배경으로 관민공동회를 개최해 개혁파 내각을 강화시키고 중추원을 의회식으로 개편하게 하여, 개혁 내각과 중추원의 협력을 통해 전반적인 국정개혁을 구조적으로 단행하려 했다. 이전의 만민공동회에서는 당면한 과제를 개별적으로 대응해 해결해 왔으나, 관민공동회에서는 이러한 개별적 대응의 성과를 기초로 하여 근대적 국정 개혁을 일괄해 포괄적 · 구조적으로 실현하고자 한 데에 커다란 의미가 있다.

셋째, 관민공동회의 〈헌의육조〉는 민중에 의해 발의되고 정부 대신의 찬성과 국왕의 재가까지 얻어냈다는 것은 국가의 기본 방침 설정에 있어 새로운 방식의 도입을 의미한다. 갑오경장 당시의 개혁 강령인 〈홍범십사조〉는 위로부터 국왕이 종묘에 서고하는 형식을 취해 선포되었으나, 관민공동회의 〈헌의육조〉는 밑으로부터 민중의 주장을 정부 대신을 통해 국왕에게 요구해 관철시킨 것이다. 이처럼 관민공동회는 국정 개혁의 기본 방안을 밑으로부터 민중의 힘으로 결정하게 한 점에서 역사적인 의의를 가지는 것이다. 특히, 〈헌의육조〉가 하나의 수정도 없이 그대로 재가된 사실은 독립협회와 민중의 완전한 승리를 의미하는 것이다.

넷째, 관민공동회의 결과로 의회식 중추원 관제가 반포되어 독립협회의 의회설립운동이 중추원의 의회식 개편으로 현실화되었다. 반포된 중추원 관제는 반관반민의 상원의 성격을 띤 것으로 국민의 대표성이 미흡한 점이 있었으나, 민선 의관을 규정한 근대적 입법기관의 성격을 지닌 것이다. 따라서, 관민공동회는 불완전하나마 우리 역사상 처음으로 의회제도의 실시를 확정하게 했고, 이로써 국민의 선거 참여와 입법 참여를 포함하는 국민 참정권을 공인하게 했다는 점에서 커다란 역사적 의의를 가진다.

다섯째, 관민공동회는 대회 자체로서는 일단 성공하였으나, 보수 세력의 방해로 말미암아 그 실현은 좌절되고 말았다. 그러나 대회 자체의 성공은 민중의 근대적 각성을 촉진시켜 근대적 민중운동을 이 땅에 정착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궁극적 목표 실현의 좌절은 근대적 자강 체제 수립을 무산시켜, 결국 국권의 상실까지 초래하고 말았다. →만민공동회

참고문헌

『독립신문』(1898)
『황성신문』(1898)
『승정원일기』
『朝鮮の開化思想』(姜在彦, 岩波書店, 1980)
『한국사강좌』-근대편-(이광린, 일조각, 1981)
「관민공동회소고」(유영렬, 『편사』 4, 국사편찬위원회, 1972)
「1898년의 관민공동회」(신용하, 『독립협회연구』, 일조각, 1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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