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는 각 문화권의 생활양식과 사고방식을 표상하며, 역사적으로 어떤 인간상을 바람직한 인간상으로 추구하였는가를 시사하기도 한다.
교육사상의 역사적 전개를 보면, 시간의 계열성에 더 주목하는 경향과 생활권, 즉 공간의 확장성에 더 주목하는 두 흐름이 있다.
유교문화권의 교육사상은 대체로 뒤의 경향이 짙다. 유교의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의 논리는 생활권의 확대와 함께 인간 형성이 심화되어 간다는 후자계열의 전형적인 예이다.
그리고 교육사상은 다양한 방법에 의해 탐색된다. 비교교육학의 관점에서, 각 문화권의 교육사상이 지닌 동질성과 이질성을 확인하는 방법이 그 하나의 예이다.
서양 교육사상과 동양 교육사상의 상호비교, 우리 나라·중국·일본의 교육사상의 동이성(同異性)을 확인하고, 그 특수성과 보편성을 추구하는 것이 그것이다.
또 다른 측면에서는 각 문화가 지향하고 있는 인간 형성의 핵사상(核思想)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규명하는 방법이 있다. 우리 나라의 경우, 유교·불교·동학·무속 등 사상의 변천과정에서 지향하는 이상적 인간상이 변모되는 양상을 확인하는 방법이 이에 해당한다.
그 밖에도 계급주의 사관을 근거로 하여, 계층·계급과 교육사상과의 상관성을 해명하고자 하거나, 사회적·경제적 구조 변동과 교육사상의 구조 변동의 상호연관성을 규명하고자 하는 시각도 있다. 우리 나라 문화의 변천과정에서 인간 형성의 핵사상이 변모하는 양상을 개관해보면 다음과 같다.
고대의 교육사상은 풍류도(風流道)로 집약될 수 있다. 또한 외래사상으로 유교 및 불교의 영향도 간과할 수 없다. 그러나 한국사상의 원류를 탐색하고자 할 때, 그 초점은 무교사상(巫敎思想)에 맞추어진다.
무교사상이 갖는 정신사적 의미는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생식·생산적이라는 기능적인 면과, 심리적 요소로서 정적(情的)이고 율동적인 행위를 가능하게 하는 측면이다.
한국인의 의식 저변에 율동적이고 감성적인 성향이 자리잡고 있는 것은 무교사상에서 연유한 것으로서, 그 장단점이 아울러 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단군신화 및 건국설화에서는 교육사상의 핵심이 ‘한’의 사상, ‘하느님’의 관념, 또는 현묘지도(玄妙之道)임을 찾아낼 수 있으며, 동시에 광복 후 새롭게 의미를 부여한 ‘홍익인간’ 이념의 원형을 찾아볼 수 있다.
고대사회에서 교육은 상류계급의 자제에 한정되어 있었다. 즉 교육 기회는 주로 지배계급에게만 열려 있었다. 따라서 고대의 교육적 인간상을 귀족적 인간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고대 한국인의 이상상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즉, 한국인상(像)의 원형은 ‘홍익인간’이며, 무당이며, 화랑이라고 할 수 있다. ‘홍익인간’은 단군신화 이후 오늘날의 교육이념에 명문화되기까지, 이상적인 한국인상의 모범으로 이해되고 있다.
교육사상의 원류가 무교사상이라고 볼 때, ‘무(巫)’는 그 사회적 기능으로 보아 존장자의 뜻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존장이란 곧 왕을 지칭한 말임을 신라 초에 무자(巫者)가 왕이었고 왕이 바로 무자였음을 알려 주는 남해왕의 고사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한편 화랑은 교육적·도덕적·사회적·군사적 기능에서 단체생활의 친화력을 지닌 지도자였다. 그리고 화랑은 지도자의 필수조건인 성실성으로 화랑집단에 대하여 자발성과 신뢰성을 갖도록 분위기를 조성하였다.
삼국시대에는 ‘미륵’신앙이 성행하였다. 삼국시대의 불상 중에 미륵반가좌상이 다수 현존하고 있는 것이 그 예이다.
미륵에 관련된 여러 기사로 보아, 미륵은 화랑과 아울러 한국인의 이상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신라 말 및 고려 초에 자주 언급되는 미륵 출현설은 이러한 미륵신앙이 기초가 된 기층민의 희원(希願)의 표출이라 할 것이며, 나아가서는 우리 나라 사람들이 미륵을 한국인의 이상상으로 신봉하였다는 것을 입증하는 예이다.
대표적인 교육사상가로는 원광(圓光)·원효(元曉) 및 설총(薛聰)을 들 수 있다. 원광은 7세기의 가장 영향력이 큰 교육사상가의 한 사람으로서, 그가 귀산(貴山)과 추항(箒項)에게 가르친 ‘세속오계(世俗五戒)’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가 강조한 교육이념은 힘과 슬기였고, 충(忠)·효(孝)·신(信)·용(勇)·관(寬)이라는 다섯가지 덕목이었다.
원효는 해동화엄종(海東華嚴宗)의 창시자이며, 불교사상의 주체적 자기전개를 실현했고, 불교에 의한 민중교화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설총은 원효의 아들로서, 그가 남긴 <화왕계 花王戒>는 군왕 교육사상의 일단을 보여주고 있다. 그의 군왕 교육의 이념은 유덕선정(有德善政)이었다. 그가 제시한 교육적 인간상은 정직인(正直人)이며, 군왕의 경우는 유덕인(有德人)이라고 할 수 있다.
고려시대의 학교교육은 유교경전에 의지했던 반면, 일반 민중들에게는 불교가 널리 유포되었다. 고려왕조는 개창 이래 유교로써 치국을 꾀하였고 정치제도도 이에 따랐으므로 과거제도를 추진하였다.
문신의 지위는 날로 높아가는 데 반해서 무신의 지위는 낮아져 갔으며, 그 결과 숭문경무(崇文輕武) 사상이 현저해졌다.
인종 때 국학에 설치되었던 무학재(武學齋)가 무과와 함께 폐지되어, 무신의 세력 신장에 타격을 주었다. 그러나 정중부(鄭仲夫)의 난을 계기로 문관은 심한 타격을 받아, 그 뒤 고려는 전반적으로 무인 천하가 되었다.
이에 따라 문교(文敎)도 갑자기 운이 다하여 교육제도가 유명무실하게 되었다. 특히 고종 이후 몽고군의 침략으로 문교정책은 더욱 피폐하게 되었다. 부진한 상태에 있던 국학은 안향(安珦)에서 비롯된 주자학(朱子學)의 수용으로 크게 촉발되었다.
그 뒤 백이정(白頤正)은 직접 원나라에 가서 정주학(程朱學)을 배워 와서 이제현(李齊賢)·박충좌(朴忠佐) 등에게 전수하였다.
이리하여 주자학은 고려 말 유교 발흥의 기운을 타고 새로운 정치철학·교육철학으로 등장하였다. 그러나 주자학은 조선사회에 이르러서야 본격적으로 깊은 연구와 발달이 있었다.
고려사회가 추구한 교육적 인간상은 신앙적 인간상이었다. 이색(李穡)은 불교와 유교가 궁극에 있어서는 같은 진리를 이름만 달리하였다고 주장하고, 양자간에는 하등 모순이 없는 것으로 파악하였다. 이 점에서 그는 ‘불심유성동일관(佛心儒性同一觀)’을 지니고 있었다.
한편 지눌(知訥)은 ≪수심결 修心訣≫에서 자아각성의 길과 자아실현의 방법을 설파하였다. 즉, “세상은 고해(苦海:고통의 바다)이다. 그 괴로움에서 벗어나려면 스스로 부처가 되는 길을 찾아야 한다. 마음이 바로 부처이다.
스스로의 마음을 떠나 따로 부처를 찾아 헤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자신이 진불(眞佛:참부처)임을 모르면 아무리 오랫동안 고행하고 공덕을 쌓아도, 이는 마치 모래를 삶아 밥을 지으려는 것과 같다. ”고 하여, 각(覺:깨달음)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또한 “도에 들어가는 문은 다양하다. 그러나 요약하면 돈오(頓悟:한 번에 깨달음)와 점수(漸修:단계를 거쳐 수행하고 도를 얻는 것)의 두 문에 불과하다. 이 돈점(頓漸:돈교와 점교)의 두 문은 모든 성현들의 규범이다. 돈오에 의지하여 점수해야 한다.
이미 돈오했다면 그만이지 왜 점수해야 하는가. 내가 바로 부처인 줄 모르고 공연히 잘못된 길에서 방황하다가, 눈 밝은 스승의 깨우침을 받아 홀연히 깨닫고 보면 바로 내가 본래 부처라. 그 깨달음 자체야 부처와 다를 바 없다. ”고 하여 돈오의 중요성을 논하였다.
지눌의 이러한 견해에서, 우리는 부처가 되기를 힘썼던 고려사회의 교육적 인간상을 찾아볼 수 있다.
대표적인 교육사상가로는 최충(崔冲)·안향·이색 및 정몽주(鄭夢周)를 들 수 있다.
최충은 글을 숭상하는 숭문사상과 교육에 기여한 바 크다. 그의 교육이념은, 국가발전의 기초는 교육이라는 신조에 있었다.
그는 72세에 관직에서 물러난 뒤 사재(私財)로 구재(九齋:아홉 군데의 학당)를 지어 후진교육에 힘썼다. 이것은 고려사회의 유력한 사학(私學)의 성립을 의미하는 것이며, ‘최공도(崔公徒)’라고 불리었다.
그의 사학 설립을 계기로 이른바 십이도(十二徒:열두 사학, 십이공도)가 형성되어, 고려말의 학문 발달에 커다란 공헌을 하였다.
안향은 살아서는 국학의 재건에 힘썼고, 죽어서는 후세에 ‘서원’ 건립의 원인이 된 사람이다. 생존 당시 주자학을 도입하여 13세기 이후 점차 학풍을 바꾸게 하고, 마침내 15∼16세기에 이르러서는 성리학의 일대 융성을 보게 하였다.
이색은 ‘불심유성동일관’에 입각한 교육이념을 지닌 사람으로서, 그가 생각한 교육적 인간상은 문무겸비인(文武兼備人)이었다. 그는 과거제에 무과를 둘 것을 강조하고, 왜구를 방어하는 대책으로 육수(陸守)·해전(海戰)을 병용할 것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또 참된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을 강조하여, “옛날 학자들은 성인이 되기를 결심했는데, 지금의 학자들은 봉록(俸祿:봉급)에만 마음을 쓰고 있다. ”라고 하여 도덕적 삶을 강조하였다.
정몽주는 교육사상의 철학적 기초를 주자학에 두었다. 그의 교육이념은 치지궁행(致知躬行)에 있었다. 더욱이 그의 절의와 정대(正大)함은 후대 성리학자들에게 의리론적(義理論的) 세계관을 제시하였다.
그는 우리 나라에 정주학을 보급하였으므로, 이색이 그를 격찬하여 동방이학지조(東方理學之祖)라고 하였다. “횡설수설이 이치에 닿지 않는 것이 없었다. ”는 말은, 곧 이색이 그를 격찬한 말이기도 하다.
조선 초의 성리학은 영남이 중심이었다. 길재(吉再)는 영남 사림파의 선창자로까지 일컬어지기도 한다. 선산(善山)에는 길재가 있고, 예천(醴泉)에는 조용(趙庸)과 윤상(尹祥)이 있었는데, 두 사람은 국초에 성균관 대사성으로 오랫동안 생도 교육을 맡아왔다.
이와 같은 개국 초기의 영남의 여러 선비 이외에, 학파로는 한두학파(寒蠹學派)·화담학파(花潭學派)·회퇴학파(晦退學派)·남명학파(南冥學派)·우율학파(牛栗學派)를 들게 된다.
성리학(性理學)은 존양(存養:存心養性)과 궁리를 목표로 삼았다. 존양이란 항상 선한 마음을 가지고 천부의 본성을 잘 기른다는 뜻이고, 궁리란 도리를 궁구함으로써 지식을 확실하게 한다는 뜻이다.
성현은 배우기 위해서 존양에 힘쓰고 궁리에 힘쓴다는 것이다. 이학자(理學者)들은 이것으로써 우주의 근본 원리를 탐구하여 천(天)·인(人)의 관계를 간파하고, 인생 당위의 본래 의무를 발견하고자 하였다.
즉, 우주철학으로 윤리철학을 설명하고, 이 윤리철학으로 교육철학을 연출하였다. 성리철학의 교육 목적은 윤리 도덕에 중점을 두어 선인을 양성하는 데 있고, 최종 목적은 성현의 자리에 도달하는 데 있었다.
이에 대한 교육방법은 성현을 행위의 준칙으로 삼아, 실천궁행하는 것에 중심을 두었다. 교과서는 일반적으로 ≪소학≫과 사서삼경이었고, 숭배 대상은 공자·맹자·정자(程子)·주자였다.
수양 강령은 ‘궁리와 치지’,‘정심과 성의’,‘중화(中和)와 성명(誠明)’,‘신독(愼獨)과 경정(敬靜)’이었고, 실천요목은 효(孝)·제(悌)·충(忠)·신(信)·예(禮)·의(儀)·염(廉)·치(恥) 등이었다.
우리 나라 성리학자가 추구한 교육적 인간상은 성인이요, 순유(醇儒)요, 진유(眞儒:유교의 도를 참되게 체득한 유학자)였으며, 이것이 곧 선비였다. 그리고 당시 그와 같은 이상상의 구현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이황(李滉)을 들 수 있다.
이황은 개인의 심술(心術)을 개명(開明)하고 기질을 변화시켜, 성현을 배우게 하는 것을 교육 목적으로 삼았다. 교수법에서는 학생을 붕우와 같이 대하였고 스승으로 자처하지 않았으며, 자신이 배우기를 싫어하지 않았다.
남을 가르치기를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재질에 따라 가르쳤고, 반복 설명하여 계발시켰고, 질병이 있을지라도 교수를 폐하지 않았다. 또, 낯빛을 부드럽게 하고 말을 거리낌 없이 자유롭게 하였으며 논리를 밝게 하고 뜻을 정연하게 하였다.
사리의 옳고 그름을 밝힐 때에 기화사창(氣和辭暢)하고 이명의정(理明義正)하여, 비록 많은 사람들이 앞다투어 말해도 참착(參錯:고르지 못함)한 담화를 하지 않고 반드시 저편 말이 끝나는 것을 기다려서 서서히 한마디로 조리있게 분석하였다.
의문처를 반성, 고증하여 진실하게 하였다. 남과 변론하다가 불합한 바가 있으면 그의 소견이 혹시 미진이 있을까 하여 선입을 주장하지 않고, 나나 남을 가리지 않고 마음을 비우고 자세히 풀어서 의리를 구하여 전훈(典訓)에 비추어 보았다.
또한, 자기 주장이 이치에 합당하고 증거가 있으면 다시 변설(辯說:사리를 분별하여 설명함)하여 기어코 그 의혹을 풀었다. 전에 지녔던 생각이 혹시 미흡한 것이 있으면 곧 자기 주장을 버리고 남의 견해를 따랐으므로 사람들이 기쁜 마음으로 복종하였다.
질문이 있으면 비록 천박하고 얕은 것이라도 반드시 잠시 생각을 한 뒤에 답을 하였으며, 말이 떨어지자마자 곧 대답하지 않았다.
학자들의 변론의 착오를 반박하지 않았다. 남과 논변할 때에 맞지 않는 것이 있어도 당장에 옳지 않다고 하지 않았고, 다만 “의리가 그렇지 않은 듯하다. ”고 말할 뿐이었다. 엄격과 친절로 교도하였으며, 항상 단정히 앉고 손발을 움직이지 않았다.
제생(諸生)과 서로 대할 때에는 존빈(尊賓)이 자리에 앉았을 때와 같이 하였는데, 시좌(侍坐:옆에서 시중을 듬)하려면 감히 앙시(仰視:바라봄)할 수가 없었다.
앞에 나아가 수교(授敎:가르침을 줄 때)할 때는 화기가 찌르는 듯하고, 훈회(訓誨:훈계하여 뉘우치게 함)하여 의문나고 알아보기 어려운 곳이 없었다.
그는 사생간(師生間)의 예의를 중시하였다. 사제지간에는 더욱 예의로써 서로 앞세워야 할 것이며, 스승이 엄하고 제자가 경(敬)하며 그 도를 각각 다할 것을 당부하였다.
과실을 교정하는 데도 효과있게 하였는데, 자손에게 허물이 있으면 준책(峻責:준엄하게 꾸짖음)을 하지 않고 순순히 타일러 스스로 마음으로 깨닫게 하였다.
비복(婢僕:사내 종과 계집 종)이라도 곧 나무라지 않았으므로 관문(關門) 안이 즐거웠고, 조용하며 친목하여 낯빛이나 음성이 변하지 않고도 만사가 스스로 다스려졌다는 것이 이황의 평소 언행이었다. 우리는 이를 통하여 도학적 인간(道學的人間)의 특성을 어느 정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교육사상가로는 이황 이외에도, 그와 쌍벽을 이룬 이이(李珥)가 있다. 이이가 매우 뛰어난 교육자임은 다음의 세 가지 점을 들어 말할 수 있다.
첫째, 예리한 역사 안목이다. 이것은 경연계(經筵啓:임금 앞에서 경전과 사서를 강론하는 자리에서 올린 말)에서 ‘십만양병’을 주장한 것으로서 널리 알려져 있거니와, ‘시무육조(時務六條)’를 올리고 양병 십만을 미리 준비하여 장차 국란에 대비하자고 주장하였던 사실이다.
이렇게 이이는 앞을 내다볼 줄 아는 예리한 역사적 안목인 ‘밝은 눈’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것은 미래 사회의 역군을 키우는 교육자의 귀중한 자품(資品:타고난 성품)이라고 하겠다.
둘째, 탁월한 실력과 학문의 독창성이다. 그는 공·맹·정·주와 서경덕(徐敬德), 조광조(趙光祖) 및 이황의 도통(道統)을 이어받았고, 이통기국설(理通氣局說) 등 독자적인 성리철학을 개창한 인물이다.
한편, ‘인심도심설(人心道心說)’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불교와 노장사상까지도 포섭하고, 그때까지의 사변적인 성리철학의 한계성을 극복하고 이를 구체적 현실과 역사 속에 접목시킨 사상의 발전을 가져왔다.
셋째, 교육학적 식견과 후진 배양이다. 이 점에서 이이는 ≪소아수지 小兒須知≫를 비롯하여, ≪자경문 自警文≫·≪격몽요결 擊蒙要訣≫·≪학교모범 學校模範≫·≪성학집요 聖學輯要≫ 및 ≪서원향약 西原鄕約≫과 ≪해주향약 海州鄕約≫ 등 교육학 논저를 통하여 논리정연한 그의 교육사상을 피력하였다.
또 김장생(金長生)을 비롯하여 조헌(趙憲)·정엽(鄭曄)·이귀(李貴)·황신(黃愼)·변이중(邊以中)·윤방(尹昉)·한교(韓嶠)·박여룡(朴汝龍)·김진강(金振綱) 등 80여 명의 뛰어난 학자를 배출하였고, 조선 후기 실학파에 큰 영향을 끼쳤다.
단순한 지식이나 기술의 전달자가 아니라, 교육학 신조의 고취자였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황과 함께 이이는 우리 나라의 교육자로서 쌍벽을 이루는 교육의 선철(先哲:옛날의 어질고 사리에 밝은 사람)이라 하겠다.
조선 후기의 교육사상은 ‘실학(實學)’을 꼽게 된다. 이 시기의 특출한 교육사상가의 한 사람으로 이익(李瀷)이 있다. 그는 특히 숭례(崇禮)와 근검사상을 강조하였다.
이익은 인간이 다른 동물과 구별되는 기준을 ‘예의’에 두었다. 그러나 당시 사대부 자제만 하여도 서화(書畫)를 비롯한 골동품에 대해서는 비상한 관심을 가지고 이를 완상(玩賞:감상)하려 하였지만, 예의에 관한 고전에 대해서는 경원하고 이를 배우려고 힘쓰지 않는다고 통탄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의관구속(衣冠舊俗:옛날 옷차림)을 잃지 않고 성인의 가르침이 한가닥 이어지고 있는 것은 사군자가 있어 그들의 행실이 모범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예조는 문서활동을 통해서 국민 전체가 예를 행하도록 힘써야 될 것”이라고 하여, 당시 문교행정 당국이 취하여야 할 구체적인 대책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이렇듯 이익은 인간의 본질을 숭례라는 관점에서 추구했다. 한편 오직 근검만이 윤택한 생활을 보장한다고 생각하였으며, 이에 관한 구체적인 요령을 제시하였다. ‘생중(生衆)’·‘식과(食寡)’·‘위질(爲疾)’·‘용서(用徐)’라는 말이 그것이다.
그런데 달리 민생의 요체는 ‘근검’에 있다고 말하기도 하였다. 즉, 부지런하면 재물이 생기는 것이요, 검약하면 궁하게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익은 또 집안을 다스리는 요체는 행실을 자유롭게 하지 못하게 하는 것 이외에는 ‘근검’에 전념하는 데 있다고 말하였다. 재상의 자제가 천한 일을 부끄러워하지 않을 때, 얼마나 근검사상이 철저한가를 알 수 있으리라고 하였다.
또한 이익은 인간평등관과 아울러 능력 제일주의를 강조하였다. 그는 말하기를, “옛날에는 거위자(居位者)를 군자라고 불렀다. 군자란 현지(賢智)한 자를 일컬음이다. 거하자(居下者)를 소인이라고 불렀다. 어리석고 불초한 자를 일컬음이었다. 현자가 거위하여 사람을 다스리고, 불초자는 거하하여 다스림을 받았음은 옳은 일이었다. ”고 하여, 능력에 따라 정당하게 대우받는 도리에 대해서 말하였다.
또, 민중들이 교육에 의해서 각성된 상태를 이상적으로 생각하면서, 현실이 그렇지 못한 데 대하여 우려의 빛을 나타내기도 하였다.
한편 능력 위주의 인간관은 그의 군왕 교육사상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익은 ≪곽우록 藿憂錄≫에서, 군왕이 정치를 하는 데 특히 유념해주기를 바라는 사항을 제시하였다. 그 중에서 교육에 관계되는 것을 정리해보면, 경연·육재(育才)·학교·숭례·식년시·입사·공거사의·선거사의·과거지폐로서, 대부분 과거에 관한 것이다.
그의 관심사가 천하에 숨은 인재를 공평하게 등용하도록 하여, 이 나라를 부강하게 하려는 데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그의 <육재>·<학교>·<숭례> 등의 글에서도, 인재양성의 중요성에 관한 지속적인 관심을 볼 수 있다. ‘경연’에서는 군왕은 자기 수양을 쌓음으로써 왕도정치를 구현할 수 있고, 백성이 행복을 누릴 수 있다는 요지의 군왕교육론을 밝히기도 하였다.
또한 그는 군왕으로서 특히 ‘상벌’을 엄정히 해줄 것을 요망하기도 하였다. 군왕이 자기 수양을 통하여 인재를 제대로 볼 수 있고, 공정하게 인사를 처리하게 되어, 어떤 경우에나 능력 위주일 것을 기대하였다.
실학파의 인간관에 대해서는 이익이 설명하는 바를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그러나 여기서는 박지원(朴趾源)의 여성관을 중심으로 하여, 그의 합리적 사고의 한 과정을 살펴 보면, 당시 여성에게만 지나치게 강요되었던 절렬사상(節烈思想:절개와 의리를 강렬하게 지키는 사상)을 비판하기도 하였다.
박지원이 쓴 <열녀함양박씨전 烈女咸陽朴氏傳>은 수절하는 일이 얼마나 인간의 본성에 어긋나는 윤리규범인가를 고발한 문학작품이다. 당시의 사회제도가 본래의 인간성을 억압하고 굴절시키는 것에 대한 항변이라고 하겠다.
또한, 풍자성이 짙은 문학작품 <호질 虎叱>을 통하여 주인공인 ‘동리자(東里子)’의 가장된 절렬(節烈)을 폭로한 데서, 인간으로서의 여성을 생각한 그의 사상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조선 후기사회의 교육적 인간상을 ‘합리적 인간’이라고 하여, 조선 전기사회의 ‘도학적 인간’과 구별할 수 있다.
대표적인 교육사상가로는 유형원(柳馨遠)을 비롯하여, 이식(李植)·이익·박지원·이덕무(李德懋)·정약용(丁若鏞) 등을 들 수 있다. 유형원은 교육 기회 확대를 통한 신분제의 점진적 철폐를 구상하여 하층민 교육을 제한적으로 검토하였다.
그는 토지제도를 비롯한 사회적 부조리에 대하여 그 부당함을 지적하고 개혁안을 제시한 바 있으며, 능력에 따라 정치 및 교육의 기회가 균등하게 부여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가 구상한 학제(學制)는 능력주의에 기초를 둔 것이었다. 당시의 학제는 특히 향교의 경우, 인재 등용과는 거의 관계없이 존재하였으며 교육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였으므로, 유형원은 이에 대한 개혁 방안으로서 ‘공거제안(貢擧制案)’을 제창하였다.
즉, 학교야말로 오랫동안의 관찰과 교육을 통하여 참된 인물을 선발, 천거해낼 수 있는 기구라고 보았으며, 따라서 신분 여하를 묻지 않고 입학할 수 있어야 된다고 생각하였다.
유형원의 학제 구상은, 향(鄕)에는 ‘향상(鄕庠)’을, 서울의 방에는 ‘방상(坊庠)’을 설치하고, 다음으로 도호부·목·군·현에는 ‘읍학(邑學)’, 서울에는 이전처럼 ‘사학(四學)’을 두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들 학교에서 선발한 학생을 교육하는 학교로서 각 도에 ‘영학(營學)’을, 서울에는 ‘중학’을 설치하여야 하며, 전국의 ‘영학’과 서울의 ‘중학’에서 선발, 천거한 학생을 교육하기 위하여 서울에 ‘태학(太學)’을 두도록 한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태학에서 선발한 학생을 ‘진사원(進士院)’에서 실습을 시킴으로써, 대체로 40세에 이르러서야 본격적으로 관계(官界)에서 활약하도록 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 경우 향상이나 방상은 단순한 초등교육기관으로서, 누구나 교육을 받을 수 있게 하는 것이었다.
다만 읍학이나 사학은 “공장(工匠)·상인·시정의 아들 및 무격(巫覡)·잡류의 아들과 공사노비(公私奴婢)의 아들은 입학을 허락하지 않는다. ”고 하여, 그 자신도 일부 하층민 교육을 일정한 수준에서 제한하고자 하는 한계성을 보여 주었다.
그는 상급학교는 관리 양성에 목적이 있고, 따라서 나이로 서열을 가리고 토지도 내려 주고 군역도 면제함으로써, 전액 국비로 교육을 받게 할 것을 제안하였다.
읍학이나 사학에 들어가는 자의 나이는 15세 이상으로 되어 있는데, 이렇듯 유형원의 교육이념은 하층민 교육에 대한 그때까지의 지극히 부정적인 태도에서 한발 앞서갔다.
19세기 말 우리 나라가 쇄국주의에서 벗어나 비로소 구미제국과 수호관계를 이루게 되자 서양문물이 직수입되었고, 이른바 우량품이라는 의미도 되는 ‘박물(舶物)’이라는 말까지도 생겼다.
이와 같은 신문명과 더불어, 교육형태나 교육내용에도 커다란 변혁이 왔다. 새 교육의 대강령(3조)이 제시되고, 교육으로써 나라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교육입국’의 이상과 굳은 결심을 피력한 조서가 반포된 것은 1895년(고종 32) 2월의 일이었다.
이 교육조서에서는, 교육은 고인(古人)의 찌꺼기만 좇는 것이 아니고 실용을 취하여야 하며, 교육의 실제는 덕·체·지의 삼육(三育)에 있다고 하였다. 따라서 학교를 많이 세우고 인재를 양성하여, 국가 중흥의 전기를 확보할 것을 천명하였다.
한편, 19세기 말 한국 근대사회에서 자주정신을 보인 것은 ‘동학’이었다. 동학은 경주의 몰락양반 출신인 최제우(崔濟愚)가 창시하였다. 동학은 기층민에 토대를 둔 무속신앙과 유·불·선의 3교를 융합하여, 독자적인 종교를 이루었다. 동학의 후신인 천도교는 1919년 3·1운동의 중심세력으로도 크게 기여하였다.
일본이 지배한 35년간은 곧 민족 수난에 대한 교육적 저항의 시기이기도 하였으며, 이때의 <독립선언서>에는 우리의 독립의지가 선명하게 제시되었다.
일찍이 이기(李沂)는 <일부벽파론 一斧劈破論>에서 ‘국권회복’이 우리의 교육이념이 되어야 할 것을 주장하였다. 구한말 사학의 격증은 ‘국권회복’과 ‘애국계몽’이 그 이념의 원동력이었다.
당시에 설립되었던 대성학교(大成學校)와 오산학교(五山學校) 등은 설립목적이 애국적 인간 배양에 있었음을 특징적으로 보여준다.
대성학교의 건학정신은 단적으로 말해서, ‘건전한 인격을 가진 애국심 있는 국민의 양성’에 있었다. 이것은 곧 설립자 안창호(安昌浩)의 교육이념이었다.
대성학교의 건학정신은 달리 다음 네 가지로 표시된다. ① 건전한 인격의 함양, ② 애국정신이 강한 민족운동가 양성, ③ 국민으로서 실력을 구비한 인재의 육성, ④ 강장한 체력의 훈련인데, ‘인격의 함양’이 그 정점을 이루었다.
인격의 함양이란 참됨을 중심으로 삼는 일이며 죽더라도 거짓이 없게 하려는 것이고, ‘거짓이 없는 성실한 사람’이 된다는 뜻이다.
이렇듯 대성학교의 건학정신은 민족주의를 고취하고 장래 항일의 투사로 양성하는 데 있었고, 교육적 인간상으로서 ‘성실을 근본으로 하는 건전한 인격’을 지닌 사람을 강조했다.
한편 오산학교의 건학정신은 애국적 인간의 배양을 목표로 했는데, 민족독립과 민족문화의 창달에 탁월한 업적을 남긴 졸업생의 배출로 결실을 보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애국적 인간의 형성은 이 시기에 도처에서 애국적인 교육자들에 의하여 이루어지고 있었다.
대표적인 교육사상가로는 이상수(李象秀)를 비롯하여 이기·이승훈(李昇薰) 및 안창호를 들 수 있다. 안창호의 민족사상은 곧 그의 교육사상이었다. 그의 교육이념은 자아혁신과 무실역행(務實力行) 및 점진공부(漸進工夫)라는 세 가지였다.
안창호가 바랐던 것은 자아혁신이요, 자아혁신은 곧 민족혁신이요, 최고 민족 완성이었다. 그는 우리 민족이 지니고 있는 거짓과 공론의 두 가지 결점을 지적하였다. 첫째 결함은 우리 민족이 허위의 폐습에 젖었다는 것이며,
둘째 결함은 공담(空談)·공론이었다. 거짓과 공론을 우리 민족성의 가장 큰 결함이라고 간주한 그는 무실역행을 대책으로 제시하였다. 참을 힘쓰고, 행(行)을 힘쓰자는 것이었다. 자기 자신이 이를 실천하여, 도덕적 검속에 있어서도 독창적이었고, 의복·식사 및 거처에 모두 자율적 규거가 있었다.
동시에 그는 도덕이 예의가 아니면 나타날 수 없고, 예의는 각 개인의 반복 실행에 의한 습관 형성력이 아니면 자리잡을 수 없다고 하였다.
그의 일거일동은 모두 이러한 고행수련의 결과였다. 또한, 민족 운동은 힘으로 결정되는 것이라고 하였는데, 그 힘이라는 것은 민족 각 개인의 덕력과 지력과 체력의 종합이었다.
그의 면학태도는 점진공부로 요약할 수 있다. 60평생에 나날이 새로운 점진공부를 계속하였으며, 그가 고향에 세운 학교 이름도 ‘점진학교’였다.
따라서 그가 생각한 교육적 인간상은 무실역행하는 성실인이었다. 안창호는 거짓없는 성실한 사람이 될 것을 바랐고, 자기 자신이 이것을 몸소 실천하였다.
한편 안창호의 민족주의는 세계주의를 지향하였다. 우리 민족을 서로 사랑하는 민족, 거짓이 없는 민족, 화평한 민족으로 만드는 것은 곧 세계 인류를 그렇게 만드는 길이라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흥사단운동으로 우리 나라를 이상국으로 만들면, 인류에게 모범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
그 이유로서 우리 국토가 아름답고 지세가 뛰어나다는 것, 민족의 혈통과 문화가 단일한 것, 타고난 소질이 우수한 것 등을 들었다.
그리고 동서고금의 문화를 집대성하는 지리적·역사적 처지에 있으니, 우리 민족이 이 사명을 자각하여 노력만 계속하면 반드시 이상국이 될 것이라고 믿었다.
광복 후 우리가 추구해온 교육사상은 민주주의였다. 듀이(Dewey,J.)의 저서 ≪민주주의와 교육≫은 우리 나라 교육에 하나의 지표가 되었다.
그러나 민족정신의 재발견과 도의교육의 제창 등, 우리의 교육적 전통의 발굴 및 계승을 위한 노력이 축적되기도 하였다.
이리하여 1980년대에 이르러서는 왕성한 국학연구열과 함께, 한편으로는 계속적인 현대 외국 사조의 섭취·동화의 노력이 있기에, 어느 때보다도 새로운 문화 창조가 가능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새로운 교육철학의 정립이 구체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시기가 온 것이다.
우리는 광복과 더불어 민주적 인간의 배양을 교육적 인간상으로 삼았다. 그것을 더 한국적으로 표현한 것이 ‘홍익인간’이기도 하였다.
그런데 민주주의 교육, 민주적 인간을 생각한다는 데 있어서는 이의가 없다고 하면서도, ‘홍익인간의 이념’ 자체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다른 의견이 속출하였다.
그것을 살펴보면, <교육법> 제1조에 “교육은 홍익인간의 이념 아래, 모든 국민으로 하여금 인격을 완성하고 자주적 생활능력과 공민으로서의 자질을 갖추게 하여 민주국가 발전에 봉사하며, 인류공영의 이상실현에 기여하게 함을 목적으로 한다.”고 규정되어 있다.
이렇듯 우리 나라는 광복 이래로 ‘홍익인간’ 이념을 교육이념으로 삼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한 교육철학적 해석은 매우 빈약한 편이어서, 1968년에 이르러서는 우리 나라 교육이념의 부재현상에 대한 긴급조처로서 <국민교육헌장>을 제정, 공포하게 된 적도 있다.
그러면서 ‘한국 교육철학의 정립’이라는 것은 여전히 우리 나라 교육계 및 교육학계의 지대한 관심사가 되어 있으며, 계속 학문적 연구가 있어야 할 당면과제가 되고 있다.
‘홍익인간’의 이념을 원형으로 삼아, 그 동안 제기된 우리 나라 교육이념에 관한 논설을 형태별로 보면 모두 12가지가 된다. ① 해설형:백낙준(白樂濬)에 의하여 제창된 ‘홍익인간’의 이념을 지지하면서 그 타당성 내지 요지를 해설하는 경우인데, 이를테면 문교부에서 간행되는 서책에서 흔히 볼 수 있다.
② 모색형:다른 말로는 ‘문제제기형’이라고 할 성질의 것으로서, 일단 ‘홍익인간’은 적합치 않다고 부정하면서도 구체적인 교육이념을 제시하지 못한 경우이다.
③ 사상 이식형:광복 후부터 듀이의 교육철학으로 한국 교육을 이끌어 온 일련의 진보주의 교육철학 지지자의 경우를 비롯하여, 그 뒤에도 수많은 외래 교육철학을 바탕으로 우리 나라 교육을 주도하려고 노력한 것을 가리켜 말한다.
④ 과제 해결형:‘통일에 대비한 교육’ 같은 데서 보이는 교육이념으로서, 우리의 현실적 과제에 대한 하나의 해답을 얻기 위해서 제시되는 경우이다.
⑤ 질문지형:우리 나라 교육의 이념 내지 교육의 가치관을 설정하는 한 가지 방도로서, 학부모 또는 학생 등을 대상으로 질문을 사용하는 경우를 가리켜 말한 것이다.
⑥ 다기접근형(多岐接近型):우리 나라 교육 이념 설정은 한두 사람의 생각이나 힘으로 될 것이 아니라는 기본적 발상에서 나온 것이다. 여기서는 학문영역을 각기 달리하는 수많은 인사가 동시에 관여하는 것으로서, <국민교육헌장> 또한 그러한 성과의 하나라고 하겠다.
⑦ 사상 원류형:우리 나라 교육 이념을 정립하는 데 있어서, 사상의 기저를 우리 나라의 고대사상에서 찾아보려는 경향과 노력을 가리켜 하는 말이다.
⑧ 사회과학형:이를테면 ≪교육과 정치―우리 교육의 개혁을 위한 전망≫이라는 책은 이 유형에 속하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⑨ 형이상학형:‘본질추구형’이라고 말하여도 좋은 것으로서, ≪발전 한국의 교육이념탐구≫(1973)가 그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다.
⑩ 자유방임형:교육이념이나 교육의 가치체계는 기성세대나 교사가 가르칠 성질의 것이 아니고 피교육자 자신에게 맡겨야 된다는 생각의 것으로서, ≪가치관과 교육≫(1972)이 있다.
⑪ 비교 사상형:이를테면 ≪아시아지역 6개국의 초등교육의 목표 분석≫(1972)은 여기에 속하는 것의 하나라고 하겠다.
⑫ 논리구조지남형:≪한국교육의 이념≫(1968) 및 ≪기초주의≫(1973)에서 논술된바, ‘3이념(시간·자유·질서)’과 ‘6개념(문화·생활·지성·인격·협동·봉사)’으로 표시되어 있다. ‘전통과 개혁의 조화를 통한 인간 형성의 논리’이기도 하다. 또한 역사의식을 강조하기도 한다.
그 동안 전개된 한국 현대 교육사상을 정리해 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첫째, 홍익인간의 이념과 듀이 교육철학의 주도이다. 이 시기를 편의상 제1기라고 부른다면, 그 기간은 대체로 1945년부터 1953년까지로 설정할 수 있다.
둘째, 다양한 현대 구미 교육철학의 소개 및 수용기이다. 그 기간을 제2기로 보면 대체로 1953년부터 1963년까지라고 하겠다.
이 시기 교육철학사의 특징은 듀이 교육철학에 대한 회의 내지 비판과 아울러, 다양한 현대 구미 교육철학의 소개 및 수용이다.
주로 소개된 교육철학은 마리탱(Maritain,J.)을 비롯하여 허친스(Hutchins,R.M.)·울릭크(Ulich,R.)·화이트헤드(Whitehead,A.N.)·브로우디(Brou·dy,H.S.)·브라멜드(Brameld,T.)·브루너(Bruner,J.S.)·넬러(Kneller,G.F.)·볼노(Bollnow,O.F.)·허스트(Hirst,P.H.)·피터즈(Peters,R.S.)·페닉스(Phenix,P.H.)·슈프랑거(Spranger,E.) 및 닐(Niell,A.S.) 등으로서, 항존주의·본질주의·개조주의·구조주의·실존주의·분석주의·문화주의 등이었다.
셋째, 교육적 전통의 발굴 및 새로운 교육철학의 정립기이다. 이 시기를 제3기로 보면 1963년부터 오늘날까지인데, 그 특징적 노력으로는 교육사·교육철학연구회와 한국교육사연구회의 결성 및 발전, 한국의 교육적 전통의 발굴, 교육철학서의 간행 및 새로운 한국교육철학의 정립 등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1990년대에 이르러 새로운 한국교육철학의 정립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국제적으로도 인정받게 된 것은 ‘기초주의(基礎主義)이다’.
이는 1995년 제6회 후쿠오카 아시아문화상 학술연구상 국제부문에서 한기언(韓基彦)의 기초주의 교육이론이 ‘독창적인 한국을 대표하는 학설이라’ 하여 수상 이유를 밝힘으로써 공식적으로 인정받았다.
그 주제로는 <상황과 기초:구상 교육철학으로서의 기초주의>(1990)와 <한국현대교육철학·기초주의의 탄생과 성장>(1996) 및 <기초주의 교육학>(1998)이 있다.
그리고 1957년에 제창된 ‘기초주의’ 40주년을 기리는 기념논문집인 ≪교육의 세기와 기초주의≫(1997)가 ‘기초주의 40주년 기념행사 준비위원회’에 의하여 간행되었다. 이는 기초주의에 대한 국내 학계의 긍정적인 반응의 하나라고 하겠다.
기초주의는 ‘전통과 개혁의 조화를 통한 인간 형성의 논리’요, ‘모든 사람들의 인생을 예술적 경지에까지 승화시키는 인간 형성의 기본원리’로서 포스트모던의 초극이요 새로운 교육철학의 지평을 연 것이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