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 두 차례의 양란을 겪으면서 조선은 급격한 사회 변동을 경험하였다. 유망민의 증가로 사회 유동성이 증가하였으며, 농업 생산력의 제고, 유통 부문의 성장 등 경제적 변화가 일어났다. 조선 정부는 이 같은 변화에 대응하여 지방 사회를 안정시키고 효율적으로 통제하기 위해 수령권을 강화하는 한편, 구관당상에게 지방 행정 실태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수령을 관리 감독하게 하였다.
구관당상은 비변사의 제조 중에서 계차에 의해 선임되었으며 일정한 정원은 없었다. 구관당상은 특정한 사안을 책임지고 처리하는 당상으로 초기에는 주로 군사 관련 사안이 많았으나 점차 사회 경제적 사안으로 확대되었다.
광해군 때에는 양남주사(兩南舟師), 조총(鳥銃), 북도사민추쇄(北道徙民推刷), 노비(奴婢), 북도군향(北道軍餉), 강도(江都), 수원(水原) 등에 구관당상을 두어 전후 복구 처리 및 군사 관련 사항을 관장하였다. 인조 때에는 강도(江都), 염철(鹽鐵) 등에 구관당상을 임명하여 전비 태세 및 재정 보충 대책을 강구하였고, 현종 때에는 진휼재생(賑恤裁省), 제언사(堤堰司) 등에 구관당상을 임명하였다.
숙종 때에는 기민(飢民), 양역(良役), 연해어염(沿海魚鹽), 팔도(八道), 선혜청(宣惠廳) 등에 구관당상을 차출하여 해당 변통 사안을 전관하도록 하였다. 영조 때에는 공시(貢市), 준천사(濬川司), 주교사(舟橋司) 등에 구관당상을 운영하였고 팔도구관제를 강화하였다. 구관당상이 각 도를 직접 왕래하면서 살피도록 하였다. 세도기에는 대분이 외척이 임명되어 각도(各道), 공시, 주교사(舟橋司), 제언(堤堰) 등의 업무를 관할하였다.
한편 팔도 구관은 1713년(숙종 39) 좌의정 이이명(李頤命)의 건의에 따라 비변사의 제조 중 8도 사무에 익숙한 자를 각 1명씩 차출하고 각 도의 문서와 행정을 감독하고 책임지도록 하였다. 이때 유사당상 4명이 다시 8도 전체를 종합적으로 살피는 중층적인 형태로 바뀌었다. 또한 구관 적임자를 해당 지역 전임 관찰사로 한정하는 동시에 각 도를 직접 왕래하면서 살피게 하여 이들의 전문성을 높였다.
1865년(고종 2) 비변사가 의정부에 흡수되면서 구관당상의 직임과 역할도 사라졌다.
구관당상은 군정 · 재정 · 지방행정 등 특정 업무를 전관하여 처리하였는데, 이들을 중심으로 정책을 협의하였기 때문에 조선 후기 정책의 연속성과 전문성을 확보함과 동시에 지방에 대한 통제력이 강화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