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사관은 조선 후기, 의정부(議政府) 내의 공사색(公事色)에 배치된 종6품의 실무 관직이다. 1865년(고종 2), 비변사(備邊司)와 의정부가 통합되면서 비변사 낭청(郞廳)에서 하던 업무를 담당하였다. 정원은 11명이며 품계는 종6품이다. 참하관은 만 20개월 근무한 뒤 종6품 참상관으로 승진하였다. 주된 업무로는 업무 실태조사, 회의 참석여부 확인, 관직 후보자 추천 접수 등을 담당하였다. 1895년(고종 32)에 의정부가 폐지되면서 공사관도 함께 폐지되었다.
정원은 11인이며 품계는 종6품이다. 문관은 2인, 무관은 9인으로 구성되었다. 문관은 시종신(侍從臣) 중에서 임명하였으며, 적간(摘奸)할 때에는 인원수에 구애받지 않았다. 무관은 9인 중 5인은 참상관으로, 4인은 참하관으로 임명하였다. 이 중 참상관의 천거는 이조에서 담당하고, 참하관으로 계하되면 이조에서 녹패(祿牌)를 만들어 주었다.
참하관이 종6품으로 승진한 뒤 참하관의 직임은 병조에서 처리하였다. 특히 참하관은 만 20개월을 근무하면 종6품 참사관으로 승진하거나 지방 수령으로 임명하도록 규정되어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15개월 이상 근무하면 대부분 승진하였다.
공사관으로 선발되는 대상 관직의 경우, 무관은 내금위(內禁衛), 무과 출신, 선전관(宣傳官), 삼군부종사관(三軍府從事官), 참군(參軍) 등이었다. 문관은 부교리, 주사(主事), 사성(司成), 우통례(右通禮), 전적(典籍), 교리, 수찬, 부수찬, 상례(相禮), 사복(司僕), 집의(執義), 부응교(副應敎), 별겸춘추(別兼春秋), 병조정랑 등 다양하였다.
근무 장소는 비변사 청사였던 의정부 조방(朝房)을 사용하였다. 이곳에서 매일 2명이 머물면서 1명은 입직(入直)하고, 1명은 관청 및 관원에게 문서 등을 회공하는 일을 하였다. 공사관의 업무는 공사색의 도상(都相)과 당상의 업무를 보좌하며 공사색의 실무를 수행하였다. 사실 관계를 조사하는 적간(摘奸), 회의 참석 여부를 확인하는 탈품(頉稟), 관직 후보자의 추천을 받는 수천(受薦) 등의 일을 전담하였다.
그 밖에 표류인 조사, 각사(各司) 및 각영(各營)의 창고 관리 감독, 각사 구임인(久任人)의 입시(入侍) 때에 동석(同席)하는 일이었다. 이들이 올리는 초기(草記)는 비록 재계일(齊戒日)이나 한밤중일지라도 구애받지 않고 보고할 수 있었다.
공사관에 대한 인사권은 1870년(고종 7)에 영의정 김병학의 건의로, 참상의 천거는 이조로 넘기고, 참하는 왕의 재가를 받은 후에 이조에서 단부(單付)하도록 하였다. 1895년(고종 32), 정부의 직제 개정으로 의정부가 폐지되면서 공사관도 함께 폐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