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교육기관이었던 성균관(成均館)의 종3품 관직이다. 성균관은 최고의 교육기관으로 국학(國學)이라 하며 학궁(學宮) 혹은 반궁(泮宮)이라고도 하였다. 성균관이라는 명칭은 고려 충렬왕 때부터 사용하던 것을 이어받은 것이다. 조선을 건국한 후 한양에 새로 짓기 시작하여 1398년(태조 7)에 완성되었다.
사성은 고려 말 공민왕 대에도 종3품 관직이었으며, 정원은 1명이었다. 그러나 조선 건국 직후 태조가 관제를 새로 정할 때 사성은 없었고, 대신 종3품 관원으로 좨주(祭酒)가 있었다. 그런데 이때의 좨주는 사성과 같은 관직으로 볼 수 있다. 고려 국자감에 설치되었던 좨주는 충렬왕 대에 전주(典酒)로 개칭되었다가 충선왕 대에 좨주로 환원되었고, 공민왕 대 사성으로 명칭이 변화하였다가 조선 태조 대 좨주로 정해진 것이었다.
사성 자체가 명칭에 변동이 자주 있었던 관직이었고, 공민왕 대 관직명이 대체로 계승되었던 것을 고려할 때 조선에서 종3품 관직으로 정해진 좨주는 사성으로 볼 수 있다. 이후 사성은 『 경국대전(經國大典)』에 법제화되기 전까지 그 명칭과 인원의 변화가 있었다.
명칭은 세종 대에 사성으로 다시 개칭된 후 이후 고정되었다. 그러나 사성의 인원이 1명에서 2명으로 증가하였다. 이는 사성이 종학(宗學)에 교관을 파견하였던 것과 관계된다. 대군(大君) 이하 종실(宗室)의 자제들을 교육하기 위해 설치된 종학은 정4품 아문으로 성균관 사성 이하 정6품 전적(典籍) 이상 관원이 겸직할 수 있도록 하였다.
1430년(세종 12)에 종학에 교관을 파견하기 위해 성균관 관원의 정원을 개편하여 사성 1명을 증원하였으며, 정5품 직강(直講)과 주부(注簿)에 각기 1인씩 모두 3명을 증원하였다. 그러나 성균관 관원이 종학 또는 사부학당으로 차출됨으로써, 성균관에서 교육을 소홀히 한다는 비판을 받게 되자 세조는 각 학교에 전임교관을 확보하도록 하고, 성균관 관원의 차출을 폐지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예종 대에도 사성이 종학의 정4품 도선(導善)을 겸직하였다. 사성은 이러한 과정 속에서 2명으로 『경국대전』에 법제화되었다. 1658년(효종 9), 산림직으로 좨주를 정3품 당상관으로 설치하면서 종3품이었던 사성을 1명으로 줄였다. 이는 종학이 폐지되고 종학의 교관을 겸직하면서 증원되었던 사성을 감축할 수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