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항(李載恒)의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군망(君望)이다.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의 후손으로, 5대조는 선조(宣祖)의 큰 형인 의헌공(懿獻公) 하원군(河原君) 이정(李鋥), 고조할아버지는 당은군(唐恩군君) 이인령(李引齡), 증조할아버지는 밀산군(密山君) 정혜공(靖惠公) 이찬(李澯), 할아버지는 승정원 좌승지 겸 경연 참찬관에 증직된 이경한(李經漢)이다. 아버지 이홍서(李弘遾)는 1689년(숙종 15) 인현왕후(仁顯王后)가 폐출되자 평생 벼슬을 하지 않았고 대사헌에 증직되었다. 어머니는 의령남씨(宜寧南氏)는 충의위(忠義衛) 남득로(南得老)의 딸이다. 정처(正妻) 청주한씨(淸州韓氏)는 통덕랑(通德郞) 한성시(韓聖蓍)의 딸이고, 후처(後妻)는 광주정씨(光州鄭氏)는 정의창(鄭儀昌)의 딸이다.
1706년(숙종 32) 정시(庭試) 무과에 급제하고 선전관에 임명된 후, 훈련주부, 좌포도청 종사관, 도총도사, 훈련정, 삼수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경종 즉위 초기에 연행(燕行) 사신의 군관으로 중국 베이징에 다녀왔다. 이후 창성부사, 여주목사를 거쳐 경종 3년에는 경상 좌수사에 임명되었는데, 이홍술(李弘述)의 유배지에 오간 것이 부적절한 처신이라고 하여 파면되었다.
1724년(경종 4)에 여산부사로 나갔고, 평안 감영 중군으로 복무하였는데, 오명항(吳命恒)과도 함께 순무영(巡撫營)의 군제를 개편하였다. 이때 이이명(李頤命)의 일파라는 이유로 삭직되었다.
1724년(영조 즉위년)에 겸사복장, 남양부사, 경상우병사, 1725년(영조 1)에는 금군별장, 통제사에 임명되었다. 그는 통영곡의 운영 및 보존 방안을 강구하기도 하였지만, 반면에 통제사의 업무 수행에 대해 수차례 대간의 탄핵을 받았다. 통제영의 군무(軍務)를 5촌 서얼 친족인 막비(幕裨) 이홍운(李弘運)에게 일임하면서 폐단이 발생하였는데, 송전(松田)을 적간하면서 거둔 속전(贖錢)을 횡령한 일, 통영곡을 내다 팔아서 진휼을 제때에 할 수 없었던 일, 청어(靑魚) 바칠 때 백성들을 다그친 일, 난파선의 인명 구조자를 이홍운으로 거짓 보고하였다는 등의 내용이었다.
1726년(영조 2) 정황과 병환으로 사직하면서 아들과 함께 관직에서 물러났는데, 대간에서는 이를 당습(黨習)을 따르는 행동이라고 비판하였다. 1729년(영조 5) 6월 14일 다시 황해도 병마사와 평안도 병마사에 임명되었다. 이때 대간에서는 성 보수 비용 마련을 위해 설치하였던 겸제고(兼濟庫)의 회계 장부를 이자를 받기 어렵다고 관련 불태워 버리고 상인들의 빚을 탕감해 주었다고 비판하였다. 1731년(영조 7) 54세의 나이에 풍비(風痺)로 사망하였다.
이재항은 사람의 도리로 평생 충과 효를 강조하였다. ‘애군여애부우국여우가(愛君如愛父憂國如憂家)’ 10자를 벽에 걸어놓았는데, 이로 인해 ‘나라의 그릇〔國器〕’이라는 칭찬을 받기도 하였다. 이이명의 ‘ 비장(裨將)’이라고 평가되며, 권상유(權尙遊), 김진규(金鎭奎)와 친하게 지냈다.
글씨에 능하여 이름을 떨쳤으며, 작품으로 「이재항서첩(李載恒書帖)」이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