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기 후반부터 조선 정부 내에서는 양인(良人)이 납부하는 군역 재원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고 군역 폐단을 해결하기 위한 양역변통론이 제기되었다. 양역변통론은 군역을 대신하여 1년에 포(布) 2필을 납부해야 하는 양정(良丁)의 과중한 부담을 덜어 주는 데 있었다. 호포론(戶布論), 결포론(結布論), 유포론(遊布論) 등이 다양하게 논의되었다. 이 중에서 가장 많이 논의된 것은 모든 가호(家戶)에 군포(軍布)를 부과하도록 하는 호포론이었다. 그러나 호포론의 단점은 부세 부담 능력과 상관없이 모든 가호에 균등하게 군포를 부과하여 그 부담이 적지 않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이를 극복하기 위한 방안 중 하나로 구전론(口錢論)이 제기되었다.
구전(口錢)이란 일종의 인두세로 원래 중국 한나라에서부터 시행된 것이다. ‘모든 백성은 세금을 부담해야 할 의무가 있다[有身者有賦].’라는 관념에서 비롯되었다. 일반적으로 포(布)를 거두는 구포(口布)와 징수 방식은 동일하지만, 군포의 경우 사람마다 거두려면 최소 여러 명이 모여야 포(布)의 납부가 가능하기 때문에 어려움이 있었다. 그러므로 구포보다는 구전의 징수가 더 용이했다. 하지만 구전을 시행하기 위해서는 원활한 화폐 유통이 전제되어야만 가능했다. 당시 조선의 주된 유통 수단은 아직 동전이 아닌 포였다. 동전이 부족해지는 상황이 발생하면 구전은 시행하기 어려웠다. 구포는 징수의 어려움으로, 구전은 현실적인 어려움으로 모두 시행할 수 없었다. 양역변통론은 숙종 대 이후 본격적으로 시작하여 균역법이 실시되는 1750년(영조 26)까지 지속적으로 논의되었다. 그러나 이 과정 속에서 구전론은 호포론이나 결포론과는 다르게 현실적인 어려움으로 더 이상 논의가 이어지지 않았다. 호포론이나 결포론이 조야의 지속적인 관심을 받은 반면, 구전론은 숙종 대 몇몇 논자들에 의해 주장되었을 뿐, 영조 대에는 주된 논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
숙종 연간 구전론을 주장한 대표적인 인물로는 판중추부사 이유(李濡), 부제학 권상유(權尙游)와 유봉휘(柳鳳輝), 우의정 신완(申琓), 판중추부사 이이명(李頤命) 등이 있다. 1702년(숙종 28) 우의정 신완은 구전을 중외의 호구에 균등하게 나누되 귀하고 천한 것을 논하지 않고 호구를 헤아려 동전을 거두는 것이라고 규정하면서, 양민과 천민을 구분하지 않고 장정을 골라 군역을 부과한다면 나라의 재정도 넉넉해지고 군대의 사기도 높아질 것이라 주장했다. 1714년(숙종 40) 부제학 권상유는 주나라 때 부포(夫布)가 있었고 한나라 고조가 정전(丁錢)을 시행하였으니 그 제도가 한나라 400년을 이어 가도록 하였으므로 시행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보았다.
가장 구체적으로 구전론을 주장한 인물은 판중추부사 이이명이었다. 그는 1711년(숙종 37) 숙종에게 올린 양역변통에 대한 차자에서 구전이 가장 낫다고 주장했다. 중국 삼대 이후로 한나라가 가장 고대 사회에 가까운데 한나라의 법이 바로 구전이라는 것이다. 한나라는 15세부터 65세까지 모든 백성을 정(丁)이라 하여 모든 정이 부전(賦錢)을 내도록 하였다고 한다. 이후 왕조가 바뀌어도 동전을 거두는 법은 변하지 않았고 당시 청나라도 모두 정은(丁銀)을 납부한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이를 지금 조선의 현실과 비교한다면 포를 징수하는 것과 비교하여 반이 줄어들 수 있다고 하였다.
이후 숙종 대 구전은 동전과 포의 징수를 함께 하자는 정포론(丁布論)으로 이어지기도 하였으나 이에 대한 반대 역시 적지 않았다. 영조 대에 다시 호포론이 강화되고 결포론의 현실성이 제기되면서 구전론은 더 이상의 논의가 진전되지 않았다. 영조 또한 호포와 결포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구전론과 이후 논의된 정포론은 양반을 비롯한 모든 양인에게 군역을 부과하고 그 대가로 세를 징수하는 것이었으므로 면역의 특혜를 누리고 있던 양반 계층에게는 불리한 부세 징수 논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