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진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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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흥 귀진사 전경
서흥 귀진사 전경
불교
유적
북한 황해북도 서흥군 숭덕산(崇德山)에 있는 고려시대 성수사의 한 원(院)으로 신축되어 조선 제13대 명종 당시 독립된 사찰.
이칭
이칭
귀진사(歸進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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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북한 황해북도 서흥군 숭덕산(崇德山)에 있는 고려시대 성수사의 한 원(院)으로 신축되어 조선 제13대 명종 당시 독립된 사찰.
내용

귀진사(歸進寺)라고도 한다. 일제강점기에는 정방산(正方山) 성불사(成佛寺)의 말사였다. 고려 중기에 창건한 성수사(星宿寺)의 한 원(院)으로 신축하였으며, 조선 명종 때 보우(普雨)가 대장경각(大藏經閣)을 짓고 불교경전을 간행하면서부터 독립된 절이 되었다.

특히, 당우들은 임진왜란 때 화를 면하였기 때문에 조선 초기의 건축양식을 많이 보존하고 있다. 이 가운데 극락전은 건축 세부양식이 섬세하고 화려한 솜씨를 보여주고 있다.

이 절에는 일제 때까지 『용감수감(龍龕手鑑)』·『법화경(法華經)』·『수륙문(水陸文)』·『사십이장경(四十二章經)』·『부모은중경(母恩重經)』 등의 판목 2,000여 장을 보관하고 있었다. 특히 1563년(명종 18)에 중간(重刊)된 『용감수감』은 보우의 명을 받은 귀진사 주지가 강독한 뒤 간행한 것으로 그 가치가 높이 평가된다.

조선시대 중기 이래 극락전 좌우로 동선당·서선당이 있었으며, 극락전 뒤에는 칠성각·관음대·칠층석탑이 있었으나 현재는 극락전과 심검당·주악루만 있다고 한다. 절이 있는 숭덕산 산정에서는 신선이 놀았다고 전해지며, 그들이 마셨다는 샘물이 있다.

이 절에 있던 도승 묵대사(默大師)와 산신령 사이에 있었던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원래 산신령과 묵대사의 사이는 좋지 않았다. 묵대사가 불경을 출판하기 전에 그 완전한 해석의 필요성을 느끼고 불교의 본산인 천축국(天竺國)에 다녀올 것을 결심하였다.

떠날 때 그는 보우에게 “내가 떠난 2, 3개월 뒤에 백마를 탄 고관이 와서 내가 죽었다고 하며 시체를 화장하자고 할 터이나, 절대로 거기에 응하여서는 안 된다.”고 당부하였다. 3개월이 지나자 그 말대로 백마를 탄 고관이 나타나서 시체를 처리해야만 한다고 강경하게 요구하였다.

승려들은 고관의 강요에 못 이겨 묵대사의 시체를 내어다 화장하였다. 그런데 화장이 끝나자마자 공중에서 “내가 지금 돌아왔는데 육신을 다비에 붙였으니 영혼은 어디에 의지하느냐.”는 소리가 슬프게 들려왔다고 하며, 백마의 고관은 산신령이었다고 한다.

참고문헌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북한사찰연구(北韓寺刹硏究)』(사찰문화연구원, 1992)
『인물(人物)의 고향』(중앙일보사, 1991)
『황해도지』(황해도, 1970)
집필자
김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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