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진사(歸進寺)라고도 한다. 일제강점기에는 정방산(正方山) 성불사(成佛寺)의 말사였다. 고려 중기에 창건한 성수사(星宿寺)의 한 원(院)으로 신축하였으며, 조선 명종 때 보우(普雨)가 대장경각(大藏經閣)을 짓고 불교경전을 간행하면서부터 독립된 절이 되었다.
특히, 당우들은 임진왜란 때 화를 면하였기 때문에 조선 초기의 건축양식을 많이 보존하고 있다. 이 가운데 극락전은 건축 세부양식이 섬세하고 화려한 솜씨를 보여주고 있다.
이 절에는 일제 때까지 『용감수감(龍龕手鑑)』·『법화경(法華經)』·『수륙문(水陸文)』·『사십이장경(四十二章經)』·『부모은중경(母恩重經)』 등의 판목 2,000여 장을 보관하고 있었다. 특히 1563년(명종 18)에 중간(重刊)된 『용감수감』은 보우의 명을 받은 귀진사 주지가 강독한 뒤 간행한 것으로 그 가치가 높이 평가된다.
조선시대 중기 이래 극락전 좌우로 동선당·서선당이 있었으며, 극락전 뒤에는 칠성각·관음대·칠층석탑이 있었으나 현재는 극락전과 심검당·주악루만 있다고 한다. 절이 있는 숭덕산 산정에서는 신선이 놀았다고 전해지며, 그들이 마셨다는 샘물이 있다.
이 절에 있던 도승 묵대사(默大師)와 산신령 사이에 있었던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원래 산신령과 묵대사의 사이는 좋지 않았다. 묵대사가 불경을 출판하기 전에 그 완전한 해석의 필요성을 느끼고 불교의 본산인 천축국(天竺國)에 다녀올 것을 결심하였다.
떠날 때 그는 보우에게 “내가 떠난 2, 3개월 뒤에 백마를 탄 고관이 와서 내가 죽었다고 하며 시체를 화장하자고 할 터이나, 절대로 거기에 응하여서는 안 된다.”고 당부하였다. 3개월이 지나자 그 말대로 백마를 탄 고관이 나타나서 시체를 처리해야만 한다고 강경하게 요구하였다.
승려들은 고관의 강요에 못 이겨 묵대사의 시체를 내어다 화장하였다. 그런데 화장이 끝나자마자 공중에서 “내가 지금 돌아왔는데 육신을 다비에 붙였으니 영혼은 어디에 의지하느냐.”는 소리가 슬프게 들려왔다고 하며, 백마의 고관은 산신령이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