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의 후궁 인빈 김씨(仁嬪金氏)의 오라버니이다. 누이가 선조의 총애를 받자 세도를 부렸다.
1591년(선조 24) 좌의정 정철(鄭澈)이 세자를 책봉할 것을 주장하자, 영의정 이산해(李山海)와 함께 정철의 주장이 인빈 김씨의 소생인 신성군(信城君)을 해치려는 것이라고 인빈 김씨를 통하여 선조에게 고하게 하였다. 이것을 들은 선조는 크게 노하여 정철을 강계로 유배시켰다.
이와 관련하여 호조판서 윤두수(尹斗壽), 좌찬성 윤근수(尹根壽) 등 서인의 영수가 물러남으로써 동인이 크게 세력을 떨치게 되었다. 1592년 내수사별좌(內需司別坐)가 되었는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가 개성에 이르렀을 때 백성들이 김공량의 실정을 들어 죄를 줄 것을 청하자 강원도 산곡(山谷)으로 숨었다.
1608년(광해군 즉위년)에 하옥되었으나 광해군의 명으로 풀려났다. 1624년(인조 2)에는 품계가 강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