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산(完山:지금의 全州) 출신. 자는 자평(子平), 호는 십주(十洲), 十州) 또는 노가재(老歌齋). 숙종조에 기성(騎省)의 서리(書吏)를 지냈다.
김천택(金天澤)과 더불어 숙종·영조 시대를 대표하는 쌍벽의 가인이다. 그가 1769년(영조 45)까지도 자신이 편찬한 가집의 보수작업을 한 것으로 보아 80세가 넘도록 생존하였음이 분명하다.
시가문학사에 남긴 업적을 정리하면 첫째, 조선시대 3대 시조집의 하나인 『해동가요(海東歌謠)』를 편찬했다는 점이다.
즉, 김천택의 『청구영언(靑丘永言)』과 제2차 청구영언이라 할 『해동가요록(海東歌謠錄)』을 저본(底本)으로 하여 1755년(영조 31)에 을해본(일명 박씨본)을 처음 만들었으며 1763년(영조 39)에 이를 고쳐 계미본(일명 주씨본)을 편찬한 것이다.
둘째, 1760년(영조 36)에 서울 화개동(花開洞)에 노가재(老歌齋)를 짓고 가악활동을 주도해 나감으로써 노가재가단[老歌齋歌壇, 일명 경정산가단(敬亭山歌壇)]을 이끌었다는 사실이다. 셋째, 시조작가로서 왕성한 창작활동을 했으며 특히 사설시조를 익명으로 하지 않고 이름을 당당히 밝혀 창작한 최초의 작가라는 점이다.
현재 전하는 작품으로는 『해동가요』 을해본에 16수, 계미본에 117수, 『청구가요』에 3수, 기타 가집에 5수가 있는데 이 중 중복된 것을 빼면 총 129수가 된다. 작품의 특징은 세 계열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평시조 형태에 담은 것으로, 근엄한 주제를 엄숙하게 노래한 부류이다. 여기에는 계심(戒心)·수분(守分)·자적(自適)을 내용으로 한 것이 많으며 충(忠)이나 신(信) 등 유교 윤리와 직접 관련 된 것도 포함된다. 사대부층 지향의 의식세계를 보여 준다 할 수 있으나 이데올로기적 관념적 취향이 다소 탈색되어 있다는 점에 약간의 차이가 있다.
둘째는 남녀의 애정관계나 서민의 생활감정을 사설시조 형태에 담아 적나라하게 나타낸 부류이다. 사설시조는 일종의 허튼 소리로 언어유희나 언어폭력을 휘두르거나 수다스런 사설의 확장을 통해 ‘사설성’을 유감없이 보여 주기 때문에 익명으로 짓고 향유하는 경우가 관례인데, 김수장은 중서 가객층 가운데 문헌으로 확인할 수 있는, 자신의 이름을 당당히 밝히고 창작한 최초의 사설시조 작가로서 특히 주목된다. 김천택은 사설시조를 단 1수도 짓지 않은 데 비해서 김수장은 39수나 남긴 점에서도 대조적이다.
셋째는 풍류 가객으로서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가악생활과 관련한 부류이다. 특히 “노ᄅᆡ ᄀᆞᆺ치 됴코 됴흔 거슬 벗님ᄂᆡ야 아돗던가……”라는 작품을 통해서는 당시 가곡창이 어떤 곡목의 레파토리로 어떻게 향유되었는가를 유추해 볼 수 있게 한다.
즉 중대엽으로부터 시작해서 삭대엽을 거쳐 낙시조와 소용, 편악의 순서로 ‘엇결어’ 불렀음에서 조선 말기의 가곡창 한바탕을 연상케 하는 원형적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