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는 대재(大哉). 남원 출신. 김천택(金天澤)이 그를 일러 “세상에 명창으로 이름이 알려졌다.”고 말한 바와 같이 당대를 대표하는 창곡의 명인이다. 자세한 전기는 알 수 없으며 기록들을 통해 추측할 뿐이다.
박영돈본(朴永弴本) 『해동가요』의 부록으로 실려 있는 『영언선(永言選)』의 서문에 그의 행적이 일부 전한다. 이에 따르면 1715년(숙종 41) 봄에 서울에서 달성(達城 : 지금의 대구)으로 와서 한유신(韓維信) 등에게 여러 해 동안 창곡을 가르쳤고, 그 뒤 심생(沈生)을 따라 밀양으로 갔다가 염병으로 객사하였다고 되어 있다.
이 기록과 김천택이 쓴 작품 후서를 종합해 보면 1717년(숙종 43)이나 1718년(숙종 44)경에 죽은 듯하다. 김천택은 『청구영언』을 편찬하면서 ‘여항육인(閭巷六人)’이라는 항목을 별도로 설정하였다. 여기에 장현(張鉉 : 張炫의 오기)·주의식(朱義植)·김삼현(金三賢)·김성기(金聖器)와 함께 김유기와 김천택 자신의 작품을 수록하고 있다.
이것으로 보면 김천택 등과 특별히 친분이 두터웠을 뿐만 아니라, 자신들이 전형적인 여항의 가인임을 자부하고 있었던 듯하다.
홍씨본(洪氏本) 『청구영언』에는 ‘한산인(閑散人)’이라는 항목 속에 그의 작품이 실려 있고, 『가곡원류』의 각 이본에는 산인(散人)이라 소개되어 있다. 이런 기록들로 미루어 볼 때, 그는 누구보다도 세속과 타협하지 않고 창곡에만 전념하였음을 알 수 있다.
오늘날 그의 작품으로 전하는 시조는 모두 15수이다. 그 중 가람본 『청구영언』·『동국가사(東國歌辭)』·『대동풍아(大東風雅)』 등에 실려 있는 5수는 다른 가집에서 다른 사람이 지은 것으로 밝혀진 것이 많아 신빙성이 없다.
진본 『청구영언』에 실려 있는 10수만은 그의 작품임이 확실하다. 김천택의 후서에 의하면 김유기의 개인 가집이 있었던 듯하다. 그러나 그가 죽은 뒤에 그것이 흩어지자, 김천택이 그 일부를 얻어 『청구영언』에 수록한 것으로 보인다. 이 10수의 작품이 후세의 많은 시조집에 실려 있는 것으로 보아, 널리 유포되었음을 알 수 있다.
김천택은 김유기의 작품에 대해 “정경(情境)을 남김없이 서술하고, 음률에 잘 조화되어 있다.”고 평하고 있다. 그러나 대체로 태평성대의 평안한 삶을 동경하거나 구가한 것으로, 소재나 내용면에서 독창적인 것 없이 사대부들의 작품세계를 그대로 답습하였다.
그는 시조 작가로서보다는 당대의 명창으로 이름을 떨친 예술인이었다. 『소대풍요(昭代風謠)』별집보유(別集補遺)에 「등루(登樓)」라는 오언율시 1편이 실려 있다. 이로 보아 한시도 지을 수 있는 교양을 갖추었고, 당시의 위항시인들과도 교류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