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는 백함(伯涵) 또는 이숙(履叔), 호는 남파(南坡). 본관과 생몰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1680년대 말에 출생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 근거는 『고금창가제씨(古今唱歌諸氏)』의 이름 나열 순서로 보아 김수장(金壽長)보다 몇 살 연장자로 짐작되기 때문이다. 김수장의 출생년이 1690년(숙종 16)이므로, 김천택의 출생년은 1680년대 말이라고 보아도 거의 틀림없을 것이다.
김천택의 가계와 신분에 대해서도 자세히 알려진 바가 없다. 『광산김씨세보』에 김천택이라는 이름이 있기는 하나, 자가 화중(和仲), 호는 몽현재(夢賢齋), 관직은 통정대부 돈녕부도정(通政大夫敦寧府都正)으로 다르게 되어 있어, 동명이인으로 보인다.
김천택의 신분에 관해 『해동가요』의 작가제씨(作歌諸氏)에는 숙종 때의 포교(捕校)라 소개되어 있다. 당시 가객들의 신분이 대부분 그러했듯이, 그도 역시 중인계층으로서 관직생활은 젊었을 때 잠시 지냈고, 거의 평생을 여항에서 가인·가객으로 지낸 것 같다.
『청구영언』에서 자신의 시조를 ‘여항육인(閭巷六人)’이라는 항목에 넣은 것을 보더라도 이를 짐작할 수가 있다.
정윤경(鄭潤卿)이 『청구영언』 서문에서 “성률(聲律)에 뛰어날 뿐만 아니라 문예에도 밝다.”라고 평하고 있는 바와 같이, 그는 당시의 일반 가객들보다는 인격이나 지적 수준이 높은 사람이었다고 추측된다.
교유인물로는 경정산가단(敬亭山歌壇)을 이룬 김유기(金裕器)·김성기(金聖器)·김중려(金重呂) 등이 있으며, 이들과 친분이 두터웠다.
시조작품은 진본(珍本) 『청구영언』에 30수, 주씨본(周氏本) 『해동가요』에 57수가 수록되어 있는데, 중복되는 것을 제외하면 73수가 된다. 박씨본(朴氏本) 『해동가요』에서 새로운 작품이 나타나기도 했다.
이를 모두 합하면 약 80수가 되므로, 당시의 가객으로서는 김수장 다음으로 많은 작품을 남긴 셈이다. 장시조는 하나도 없으며 모두가 단시조 작품이다.
내용은 강호산수를 읊은 것이 가장 많고, 교훈적인 것, 체념과 탄세적(歎世的)인 것이 많아서 사대부 시조의 경향을 답습하고 있는 느낌이다. 1728년(영조 4)에 편찬한 『청구영언』은 당시뿐만 아니라 후대에까지 가악의 발달과 가집의 편찬에 큰 영향을 주었다.
진본 『청구영언』을 김천택이 편찬한 최초의 『청구영언』으로 보고 있는데, 여기에는 580수의 작품이 실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