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경부(敬夫), 호는 개암(開岩). 경상북도 성주 출신. 김종혁(金從革)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증 도승지 김치정(金致精)이고, 아버지는 부사 김희삼(金希參)이며, 어머니는 청주곽씨(淸州郭氏)이다. 퇴계(退溪) 이황(李滉)과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문인이다..
1542년(중종 37) 향시에 수석 합격하고, 1552년(명종 7) 진사시에도 수석으로 합격하였다. 1565년 경상도 유생을 대표해 여덟 차례에 걸쳐 중 보우(普雨)의 주살을 상소하였다. 이듬해 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해 예문관검열이 되었다.
그 뒤 주서(注書)·대교(待敎)·봉교(奉敎)·전적(典籍), 예조와 병조의 좌랑·정랑, 지제교(知製敎)·정언(正言)·헌납(獻納) 등 여러 관직을 두루 지내다가 1573년(선조 6) 부수찬(副修撰)이 되었다. 1578년 사복시정(司僕寺正)을 거쳐 동부승지·대사간·대사성 등을 지내고 이듬해 병조참의·승지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수(李銖)의 옥사로 곧 파직되었다. 1582년 충청도관찰사가 되었다가 형조참의·장례원판결사·홍문관부제학 등을 역임하였다. 이듬해 유생 박제(朴濟)로부터 음흉하다는 탄핵을 받아 외직으로 물러나 청송부사·광주목사(光州牧使) 등을 지냈다.
1589년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 성주로 돌아갔다. 그 해에 동생 김우옹(金宇顒)이 정여립(鄭汝立)의 옥사에 연좌되어 안동의 임지에서 회령으로 귀양가자, 영천으로 달려가 동생을 만나 갓과 옷을 벗어주고 시 한 수를 지어 주며 이별했다 한다.
대사간으로 있을 때 사사로이 옥송(獄訟)을 결정한 형조판서를 당당히 탄핵해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상주 속수서원(涑水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개암집(開巖集)』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