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미라가극단 ()

연극
단체
광복 전후 시기의 가극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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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광복 전후 시기의 가극단.
연원 및 변천

콜롬비아악극단의 후신으로 1941년 11월에 개칭하였다. 서항석(徐恒錫)·설의식(薛義植)·박노홍(朴魯洪)·채정근(蔡廷根) 등이 주요 단원으로서, 콜롬비아악극단 때보다 좀 더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리기 위하여 송진혁(宋鎭赫)을 입단시켰다.

개칭 기념으로 1941년 11월에 서항석의 가극 <견우직녀>(전9경)와 박노홍의 희가극(喜歌劇) <신생 제1과 新生第一課>를 서울 부민관(府民館)에서 상연한 뒤 대표적인 악극단으로 군림하였다.

이들은 주로 부민관 대극장을 무대로 하여 광복 때까지 <은하수>(서항석 작)·<주마등>(이부풍 작)·<아리랑>(박노홍 작) 등을 공연하였고, 1942년 상반기에는 일본 동경을 비롯한 주요 도시를 순회공연하기도 하였다.

당시 주요 출연진은 송진혁·윤부길(尹富吉)·전나일(全那一)·태을민(太乙民)·박옥초(朴玉草)·이성운(李成雲)·김용환(金龍煥)·전옥(全玉)·장동휘(張東輝) 등이었다.

또한 박용구(朴容九)가 합창부에서 활약하였고, 악극작곡가 김석민(金石民)과 황문평(黃文平)도 이 시기에 입단하였다. 대표 또한 초대의 최무성(崔茂盛)에서 김윤주(金潤柱)에게 넘어갔고, 진용도 많이 보강되었다.

광복을 맞으면서 전성기를 맞아 활발한 공연활동을 벌이기 시작하였다. 광복 후에도 광복 전과 마찬가지로 박노홍의 작품을 많이 공연하였다. 주로 서울 동양극장에서 박노홍의 작품인 <바보 용칠>·<수양버들>·<청춘> 등을 공연하였으며, 작품에 따라 쇼도 겸해서 공연하였다.

1948년 미군정은 극장세를 인상하자 흥행계가 급속도로 쇠퇴하였는데, 이 가극단 역시 큰 타격을 받고 쇠퇴일로를 걸었다. 1957년에는 대표인 김윤주가 죽었고, 차츰 영화가 인기를 끌면서 악극계가 쇠퇴함에 따라 이 가극단 또한 해체되고, 남은 사람들은 쇼단으로 흘러갔다.

의의와 평가

이 악극단의 공로는 무엇보다 오랫동안 존속하면서 많은 악극 연기자·작곡가들을 길러낸 데 있다.

참고문헌

「한국악극사」(박노홍, 『한국연극』, 1978.6.∼197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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