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타가극단은 1930년대 후반에 조직되어 활동하다가 반도가극단으로 개명하였다. 이 가극단은 성태삼(星泰三)의 「군국(軍國)의 춘(春)」으로 동보극장(東寶劇場)에서 개칭기념 공연을 가진 뒤 만주 등지까지 순회공연을 벌였다.
경영주였던 서민호(徐珉濠)가 조선어학회사건으로 구속되자 박구(朴九)가 맡아 운영하였으며, 1943년에는 신작인 서항석(徐恒錫)의 「심청전(沈淸傳)」을 공연하여 성공을 거두었다.
그 뒤 계속해서 「장화홍련전(薔花紅蓮傳)」(서항석 각색)을 비롯, 「견우직녀」·「화랑도」·「은하수」 등 서항석의 작품을 주로 공연하였고, 그 때마다 성공을 거두었다. 반도가극단이 다른 악극단들보다 성공을 거둔 이유는 극본이 짜임새가 있었을 뿐 아니라, 쇼는 전혀 하지 않고 고전에 치중하며 비교적 정통악극을 공연한 데 있었다. 이 가극단은 일제 통치하에서 일본어로 강제되었던 문화예술정책에 항거하는 의미로 조선어로만 진행이 가능한 정통악극을 상연함으로써 암울했던 일제강점기에 민족의 예술혼을 발휘하였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가 컸다.
광복 이후에도 과거의 단원들 그대로 1945년 9월에 서항석의 「조국」을 가지고 재출발하였다. 그 뒤 계속하여 서림(徐林)의 「원수의 38선」·「7공주」·「계월향(桂月香)」·「양창국과 강남홍」, 이광수(李光洙) 원작 「꿈」, 서항석의 「에밀레종」 등을 가지고 광복 후의 흥행계를 누볐다.
광복 후에도 여전히 현대물보다는 고전극을 주로 공연하였으나 이따금 근대적인 서정극도 공연하였다. 이처럼 광복 후에 가장 활발하게 공연활동을 벌인 악극단의 하나인 만큼 재정적으로나 흥행기술에서 돋보였다. 그러나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쇠퇴일로를 걸었고, 그 뒤에 영화의 발달로 반도가극단의 공연은 쇼로 전락하여 점차 무대에서 사라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