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4년 국가민속문화재(현, 국가민속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이 집은 풍산홍씨의 동성부락인 도래마을 안에 있는데, 솟을대문의 문간채와 안채 · 사랑채 · 사당이 있다. 안채의 상량대에 ‘임진삼월초칠일(壬辰三月初七日)’이라 쓰여 있는 것으로 보아 1892년(고종 29)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대문채와 사당은 이보다 후대에 경영되었다고 한다. 솟을대문의 문간채는 골목 끝에 있으며 단간통(單間通)의 6칸이다. 바깥벽은 중방 아래로 화방벽을 쌓고 무늬를 베풀어서 비교적 장식적이다.
동북쪽 깊숙한 곳에 一자형의 안채가 서향으로 놓이고 안마당을 사이로 해서 ㄱ자형 사랑채가 남향으로 배치되어 있다. 안마당 북쪽에는 헛간채를 두었으며, 사당은 안채 남쪽에 안채와 나란히 배치하고 담장을 둘러 구획하였다.
사랑채 역시 따로 담을 둘러 구획하였으나, 사랑채 뒷면은 안마당에 바로 면하도록 되어 있다. 담장은 대문채에서 안채까지 크게 막아서 경계를 삼되, 행랑마당에서 멀리 돌아 사랑 남쪽 담장을 안채에 이르도록 하였다.
사랑채는 6칸의 앞뒤툇집인데 서쪽 첫째 칸이 내루(內樓)이다. 다음 두 칸이 사랑방인데 위 · 아랫방으로 분할되어 있고 두 방 사이에는 네 짝의 샛장지를 설치하였다.
뒤퇴에는 골방을 드렸다. 다음 칸이 부엌이고 여기에서 꺾이면 남쪽으로 대청이고 다음이 작은사랑인데 앞쪽은 툇마루이고 뒤퇴는 벽장이다.
오량집의 구조로 방마다 앞 벽에는 창이 있으나 대청에는 문짝이 없다. 중부지방이나 남원의 몽심재(夢心齋) 등에서도 볼 수 있는 문짝이 여기에서는 시설되지 않았다.
마당에는 남쪽 담장에 면하여 축대를 두르고 화단을 조성하여 매화 · 석류 · 자목련 등 전통적인 조경수를 심어 분위기를 돋우었다. 행랑마당과 연결되는 담장에는 수키와를 사용하여 구멍을 만들어 내왕하는 사람을 알아볼 수 있도록 하였다. 안채는 정면 6칸의 앞뒤툇집이 一자형으로 서향하고 있다.
서향한 북쪽의 끝방은 앞뒤칸으로 나뉘어 앞칸이 부엌방, 뒤칸이 광으로 되어 있고 앞퇴가 없다. 다음 칸은 부엌으로 앞퇴까지가 포괄된 넓이이다. 이 집의 특색은 부엌이 끝에 있지 않고 두 번 째 칸에 있다는 점이다. 이때의 끝방에는 찬모 등이 거처하게 마련이다. 다음 칸은 방으로 앞뒤퇴에 툇마루를 설치하였다.
다음 두 칸은 대청인데 이 가운데 한 칸은 안대청과 바깥대청으로 구획되어 있다. 툇마루와의 경계에는 문짝이 달려 있고 대청 뒤퇴 중의 한 칸에는 벽장을 드렸다. 다음은 단칸의 건넌방인데 앞퇴가 있고 뒤로는 아궁이가 부설된 작은 부엌이 있으며 남쪽 끝에 반칸퇴가 있다.
이러한 안채의 구성은 아주 특이한 것으로 원래의 것이 후대에 이렇게 변형된 듯이 보이나 보편적인 형상은 아니다. 가구(架構)는 오량이며 전면 툇기둥은 두리기둥이고 나머지들은 모진기둥이다.
처마는 홑처마이고, 지붕은 팔작의 기와지붕이다. 사당은 간반통의 3칸인데 앞의 툇간은 열려 있다. 공포는 익공이며 약간의 초각(草刻)이 보인다. 단청은 하지 않았고 맞배의 기와지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