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뚝은 연소와 관련된 공기의 공급과 그을음 연기 등의 배출을 위하여 만든 구조물이다. 굴뚝은 위치와 재료에 따라 다양한 형태를 가진다. 위치에 따라 벽체에 부착되거나 따로 세워진 굴뚝, 건물 내부에 있는 굴뚝 등이 있다. 재료로는 통나무, 널빤지, 오지토관, 흙덩이, 돌, 기와 파편 등이 사용되었다. 조선 시대 궁궐에서 아름다운 굴뚝을 만드는 것은 후원 조성에서 중요한 요소였다. 현존하는 대표적 굴뚝은 경복궁 아미산의 육각형 굴뚝(보물 제811호)이다. 자경전 뒤뜰의 십장생무늬굴뚝(보물 제810호)도 뛰어난 작품이다.
화덕은 아궁이 맞은편에 굴뚝을 두어 연소할 때 발생하는 연기를 바로 뽑아낸다. 그러나 구들에서는 아궁이에 이어 구들고래, 개자리의 연도(煙道)를 거쳐서 연기가 굴뚝으로 빠지게 되어 있다.
선사시대 수혈주거지(豎穴住居址)에서 온돌구조가 발견되었으나 굴뚝의 존재는 확인되지 않았다. 다만 수혈 바깥으로 온돌의 골[炕]이 건조되었으며, 연기가 집밖으로 빠지게 만들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초기의 구들에도 굴뚝이 있었느냐의 여부는 아직 분명하지 않다. 구들은 이미 선사시대에 시작되었다. 지금까지 발견된 가장 오래된 난방시설의 흔적으로는 웅기(雄基)의 선사시대 주거지에서 발견된 구들이다. 이곳에 연도를 돕는 굴뚝이 있었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다만 연기가 빠져나갈 수 있는 구멍은 있었을 것이므로, 그것을 굴뚝의 원류로 본다면 이때에 이미 굴뚝은 사용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구당서(舊唐書)』 등의 문헌에 “ 고구려 백성들은 움집에 구들이 설비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는 아궁이 · 고래 · 굴뚝이 구비된 시설이라고 볼 수 있다. 이 때의 굴뚝은 매우 간단한 것으로 구멍만을 내는 것이었거나, 통나무 등의 속이 빈 것들을 주워와서 이용하는 등의 지혜가 동원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예는 오늘날 산곡간에서 볼 수 있는 지붕 용마루에 공기유통을 위하여 둥근 구멍을 낸 까치구멍집에서 보인다. 구멍만 빠끔하게 낸 굴뚝과 개자리에 고래의 숫자만큼 구멍을 낸 남한강유역의 가옥에서 볼 수 있다. 굴뚝의 원초형이 오늘에까지 전하여오는 것이라 하겠다.
5세기경의 고구려 운산 용호동 제1호 고분에서는 무쇠로 만든 화덕이 출토된 바 있다. 그 구조를 보면, 아궁이와 솥을 거는 부분과 고래가 있고, 고래 끝에 수직으로 굴뚝이 솟아 있다. 그 때까지 구멍만으로 연소를 돕던 것이 이 때에 와서는 그 구멍에 어떠한 시설물을 부착함으로써 오늘날의 굴뚝과 같은 모습을 갖추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안악(安岳) 제3호분의 벽화에서는 고구려시대에 이미 발달된 굴뚝이 만들어졌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여러 문헌의 기록으로 보아 고구려의 상류제택(上流第宅)에는 구들이 도입되지 않았다. 따라서 당시의 굴뚝은 장식적이기보다는 서민층에 의하여 주도된 기능 위주의 구조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므로 굴뚝은 구들이 널리 보급되고, 사원이나 공공건축 · 궁궐건축에 채택된 조선시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게 된다.
추운 곳에서 비롯된 구들이 차차 남쪽으로 전파되어 마침내 제주도에까지 보급되었다. 제주도에서는 연료로 연기가 나지 않는 건조한 말똥을 사용하였기 때문에 배기를 위한 굴뚝이 없어도 되었으므로 굴뚝의 설치가 발견되지 않고 있다. 결국 완성된 북방의 굴뚝에 비하여 따뜻한 남쪽의 굴뚝은 소략해지고, 특히 제주도에 이르러서는 거의 무시되었다. 그러나 현대에는 이러한 지역적 특징이 많이 완화되었는바, 이는 6 · 25 등의 민족이동과 최근 교통 · 통신수단의 발달로 인하여 구들과 굴뚝양식이 보편화되었기 때문이다.
현존하는 유적에 의하면 굴뚝이 설치되는 위치는, ① 벽체에 부착되어 있는 굴뚝, ② 벽체에서 약간 떨어진 자리에 따로 세워진 굴뚝, ③ 건물 내부에 있는 굴뚝 등 크게 셋으로 분류되지만, 재료나 조성법에 따라 매우 다양한 모습을 엿볼 수 있다.
①의 경우는 일반 서민층의 굴뚝으로 벽체에 의지하여 만든다. 처마 아래에 낮게 설비하기도 하고 지붕 위까지 솟아오르게 하기도 한다. 또한, 수직으로 세우거나 비스듬히 세우기도 하며 굴뚝 끝에 다른 시설을 하기도 한다.
②의 경우는 관아 · 학교 · 궁궐 · 정사(亭榭) 등에서 볼 수 있다. 이것도 키가 높은 것과 낮은 것의 두 가지가 있다. 또 여러 가지 치장을 한 것과 자연스러운 형상으로 조성된 것이 있다.
③의 경우는 서민주택 중 남쪽지방에서 볼 수 있는데, 굴뚝이 부뚜막에 들어와 서 있는 유형이다. 지금까지 조사된 바로는 낙동강유역 · 경주지방 · 남해안 및 도서지방에서 발견되었다.
또한, 재료에 따라서도 여러 가지가 있는데, ① 구멍만 빠끔하게 뚫은 것(서민주택), ② 통나무 속을 파내어 만든 것(삼림지대), ③ 널빤지로 만든 것(평야지대나 도회지), ④ 오지토관을 만들어 여러 개를 이어 완성시킨 굴뚝(옻그릇 · 오지굴뚝 등으로도 만듦.), ⑤ 빚은 흙덩이를 말려서 쌓은 것(평야지대, 서해안 도서지방에서는 그 위에 짚으로 도롱이처럼 만들어 씌웠다.), ⑥ 돌과 흙으로 번갈아가며 쌓은 것(비산비야지대), ⑦ 기와파편을 이용하여 쌓은 것(서민주택 · 사원건물), ⑧ 꽃담처럼 장식한 굴뚝(궁실), ⑨ 전돌로 쌓은 굴뚝(관아 · 궁실), ⑩ 연가(煙家)를 설치한 굴뚝(궁실 · 서민주택) 등으로 구분된다.
굴뚝의 조성방법으로는, ① 댓돌에 구멍만 낸 것(전북 지방), ② 죽담에 구멍만 낸 것(경기 · 충청 · 전라 · 경상도지방), ③ 담벼락에 구멍만 낸 것(충청북도 살미지방), ④ 구멍 끝에 약간의 배기장치가 있는 것(演慶堂 등), ⑤ 벽체의 구멍을 연장한 것(尙州 養眞堂 등), ⑥ 구멍에 질그릇 통을 끼운 것(경북 지방) 등이 있다.
그리고 굴뚝을 쌓되 담벼락에 붙여 낮게 쌓은 것(한가지로만 쌓은 것, 두 가지 이상의 자재로 쌓은 것 등이 있다.), 담벼락에 붙여 처마 아래까지 쌓은 것(수직인 것, 경사지게 설치한 것), 담벼락에 붙여 높이 쌓되 처마 위로 솟아오른 것, 담벼락에서 수평으로 약간 끌고 나간 뒤에 수직으로 높이 치쌓은 굴뚝, 그리고 그 높이를 낮게 잡은 굴뚝 등이 있다.
따로 세운 굴뚝 중에서도 마당 한쪽에 따로 만들되 키가 낮은 난장이굴뚝, 키가 높은 굴뚝, 후원의 화계(花階)에서 아름답게 치장한 것이 있다. 담장에 의지하고 만들거나 또는 담장 속에 넣고 연가를 두어 배기시키는 것(자경전 뒷담장의 십장생굴뚝) 등이 있다.
굴뚝을 고급스럽게 만들려면 쌓는 데서부터 착실하게 작업하여야 한다. 개자리에서 이어지는 불목[煙道]을 은구(隱溝)처럼 파낸다. 은구는 돌로 쌓거나 벽돌로 만들고 덮개를 덮는다. 그리고 그 위에 흙을 덮어 숨긴다. 은구 대신 오지토관을 묻기도 하며, 굴뚝 세울 자리에는 따로 단단한 기초를 하여야 한다. 굴뚝 바닥에 개자리를 만들어야 하는데, 이는 빗물이 들어갔거나 결로(結露)되는 물기가 흘러내려 가라앉게 하려는 시설이다.
굴뚝이 지표에 노출되기 시작하는 자리에는 화강석을 다듬어 설치하기도 하는데, 외벌 또는 두벌 쌓거나 세벌대로 설치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것이 기대(基臺)가 된다. 그 위로 반전(半塼)과 반반전(半半塼)으로 켜를 높여 쌓게 되는데, 화장줄눈 없이 쌓는 방법과 있게 쌓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치쌓는 중에 따로 구워 마련한 무늬판을 끼우기도 하는데, 면회법에 따르는 기법이 응용되기도 한다. 머리 쪽에서는 처마를 구성하듯이 하고, 지붕으로 오므려 올라가다가 정상부에 연가를 설치하여 바람의 역류를 막는다.
조선시대에는 궁실조영에서 굴뚝 조성에 특히 유의하여 지금도 아름다운 굴뚝들이 경복궁 · 창덕궁 · 창경궁 · 덕수궁에 남아 있다. 이는 꽃담의 치장과 맞먹는 작품들인데, 이들 굴뚝은 후원을 가꾸는 일에서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대조전(大造殿) 뒤뜰의 아름다운 굴뚝들이 마당이나 화계에 각각 위치하면서 적절한 강조의 분위기를 지닌 것은 주목할만한 것이다.
현존하는 대표적 굴뚝인 경복궁 아미산(峨嵋山)의 육각형 굴뚝(보물, 1985년 지정)은 원래 교태전(交泰殿)에 있던 것인데, 네 개의 굴뚝만이 남았다. 아미산의 조영에서 본다면 이 굴뚝을 제외시키면 아름다움이 반감되는 결정적인 요소로 볼 수 있다. 자경전 뒤뜰의 경복궁 자경전 십장생굴뚝(보물, 1985년 지정)도 뛰어난 작품에 속한다. 이들보다는 소박하지만 기와지붕을 꾸민 난장이굴뚝들이 있는데, 이는 정사나 절간에서 흔히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