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세건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전기에, 대사성, 호조참판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백순(伯順)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484년(성종 15)
사망 연도
1552년(명종 7)
본관
의령(宜寧)
주요 관직
대사성|호조참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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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 전기에, 대사성, 호조참판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백순(伯順). 할아버지는 내섬시부정 남칭(南稱)이고, 아버지는 군수 남변(南忭)이며, 어머니는 좌참찬 이훈(李塤)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524년(중종 19) 참봉으로서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529년 지평·부수찬·부교리·시독관을 거쳐 이듬해 교리가 되었다. 1531년 응교·전한을 역임하고 이듬해 시강관이 되어 기강이 해이해짐을 바로잡을 것을 주장하였다. 1533년 직제학이 되고 이듬해 대사간·동부승지·우부승지를 거쳐서 1535년 우승지가 되었다.

1536년 병조참판에 이어 충청도관찰사로 나갔으며, 이듬해 호조참판·대사헌을 역임하고 1541년 전주부윤, 1542년 한성부좌윤이 되었다. 1544년 천추사(千秋使)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이듬해 인종이 즉위하자 가선대부(嘉善大夫)로서 호조참판이 되고 『중종실록(中宗實錄)』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1545년 명종이 즉위하자 『인종실록(仁宗實錄)』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로서 사은 겸 주문진하사(謝恩兼奏聞進賀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 1546년 형조참판에 이어 이듬해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가 되었다.

1548년(명종 3) 경기도관찰사로 나가 흉년으로 인해 곤핍해진 민생을 돕고 백성들의 기근을 구제하는 데 온 힘을 다하였다. 또한 충효한 사람 및 절개를 지킨 부녀자들을 포상할 것을 왕에게 상소하였다.

1549년 공조참판이 되고 이듬해 대사성·호조참판이 되었다. 1551년 특진관이 되어 저화(楮貨)를 사용하자는 당시의 의논에 대하여 백성들이 기뻐하지 않으며 이전에도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을 이유로 반대하였다.

참고문헌

『중종실록(中宗實錄)』
『인종실록(仁宗實錄)』
『명종실록(明宗實錄)』
『국조방목(國朝榜目)』
『백헌집(白軒集)』
『모재집(慕齋集)』
『동원문집(東園文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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