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교하(交河). 자는 희량(希亮), 호는 국일재(菊逸齋). 할아버지는 동지돈영부사 노물재(盧物載)이고, 아버지는 영의정 노사신(盧思愼)이며, 어머니는 첨지(僉知) 경유근(慶由謹)의 딸이다. 경기도 교하현(交河縣: 지금의 파주)출신이다.
1462년(세조 8)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의영고직장(義盈庫直長)·사직서영(社稷署令)을 지낸 뒤 1466년 춘시 문과에 2등으로 급제, 성균관직강이 되고 홍문관전한(弘文館典翰)·부제학을 거쳐 병조·이조·예조의 참의와 도승지를 역임하였으며, 1483년 대사헌이 되었다.
그 뒤 1489년에 공조판서가 된 데 이어 6조의 판서를 두루 역임하였으며, 외직으로는 경기도관찰사를 지냈다. 1498년(연산군 4) 의정부우참찬이 되고, 1500년 교성군(交城君)에 봉해 졌다. 1503년 우찬성에 올랐으나, 이듬해 일어난 갑자사화에 연좌되어 무장(茂長)으로 장배(杖配)되었다.
그 뒤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귀양에서 풀려나와 다시 우찬성이 되었다가 1507년(중종 2)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로 승진하였다. 이때 명나라에 가서 중종 즉위의 경위를 설명하고 명나라 왕으로부터 권서국사(權署國事)의 칙지를 받아 귀국하였다. 그 공로로 원종공신(原從功臣) 1등에 녹훈되고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에 올랐다.
1514년 영중추부사로 벼슬을 그만둔 뒤 궤장(几杖)이 하사되었다. 충성심과 효심이 지극하고 일가친척의 관혼상제를 두루 살폈으나, 자신은 검소한 생활에 만족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