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풍천(豊川). 자는 입부(立夫). 호는 홍와(弘窩). 함양군 북개평리(咸陽郡北介平里)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는 진사 노희(盧禧), 어머니는 남원양씨(南原梁氏)로 승사랑(承仕郞) 양응기(梁應麒)의 딸이다.
14세에 입학하여 경사(經史)를 배웠다. 12세에 친상(親喪)을 당했으나 집상하는 모습이 노성인과 같이 예를 다했다. 1552년(명종 7)에 남계서원(藍溪書院)의 장서(掌書)가 되고 5년 후에 상유사(上有司)가 되었다.
1560년(명종 15) 향시(鄕試)에 합격하였으나 남성(南省)의 길이 중지되었으므로 과거를 포기하고 위기의 학문에 전념하여 『심경(心經)』·『근사록(近思錄)』을 숙독하고, 태극·음양·수리(數理)의 학문에도 통했다.
1568년(선조 1) 30세로 남계서원 원장(院長)에 부임하여 『경임안(經任案)』 1책을 저술했다. 1578년 정철(鄭澈)이 동몽교관(童蒙敎官)·선공감역(繕工監役) 등에 추천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1592년 왜군이 부산에 침입하자, 마을의 장정을 모아 의병을 일으켰는데 1,000여 명이 모이고 군량 수백 석이 모집되었다. 문하인 최변(崔汴)으로 향병장(鄕兵將)을 삼아 김면(金沔)의 군과 합류하여 적과 싸워 많은 공적을 남기고 이듬 해에는 초유사(招諭使) 김성일(金誠一)의 참모로 활약했다.
1609년(광해군 1)에 효(孝)와 임진공훈으로 정려(旌閭)가 내려졌고, 1824년(순조 24)에 도곡서원(道谷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홍와유고(弘窩遺稿)』 2권과 『사서찬요(四書纂要)』 1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