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경남도 함흥출생. 광복 이후 북한 고고학 발전에 큰 공적을 남긴 학자이다.
집안은 대대로 함흥에서 살아온 비교적 유복한 가정으로 알려져 왔다. 함흥 영신학교와 함흥 영생학교 4년을 마치고 1922년 서울의 휘문고등보통학교 5학년에 편입해 1923년 졸업하였다. 이 해 신흥공립보통학교에서 교편을 잡다가 1924년 사직하고, 경성고등상업학교에 진학해 1929년 졸업하였다.
그 해 중국 북경(北京)으로 가서 연경대학문학원(燕京大學文學院)에 입학해 1년간 수학하다가 이듬 해 다시 유럽으로 떠났다. 1931년 독일의 프랑크푸르트대학에 입학해 사회철학과 사회사를 공부하였고, 1933년 오스트리아의 빈대학 사학과로 옮겨 고고학을 전공, 1935년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그 뒤 바로 빈대학 선사연구소에 들어가 1939년 귀국할 때까지 고고학과 민속학을 연구하였다.
귀국 후 일제의 탄압으로 아무 일도 못하다가 1942년 일본 동경(東京)으로 건너가서 대학선배인 오카(岡正雄)를 도와 멩힌(Menghin, O.)의 『Weltgeschichte Der Steinzeit』(Wien, 1931)을 번역해 『석기시대의 세계사(石器時代の世界史)』로 출판하기도 하였다.
1945년 광복이 되자 잠시 함흥시립도서관장과 함흥의과대학 강사를 지내다가 생활에 만족을 느끼지 못하고 월남하였다.
1946년 공산당에 입당해 인민당 외교부장(人民黨外交部長)과 과학자동맹위원장직을 맡았다가 미군정의 체포령이 내리자 가족과 함께 월북하였다. 평양에서는 1947년 김일성종합대학의 교수와 고고학연구소장, 1949년 조선역사편찬위원회 원시사분과위원회 위원이 되었다. 1952년 과학원이 설립되자 물질문화연구소의 초대소장직에 오르고, 1959년 고고학 및 민속학연구소로 개칭된 뒤에도 그대로 소장직을 맡았다.
그가 20년간 평양에서 행한 유적의 발굴조사는 대단한 성과로 평가되고 있다. 중요한 유적으로는 1947년 송평동패총, 1949년 안악3호분·나진 초도유적, 1950년 용강 궁상리유적, 1954년 회령 오동유적, 1955년 승호 금탄리유적·강남 원암리유적, 1956년 영흥 용강리토성·사리원 상매리석관묘, 1957년 봉산 지탑리유적, 1959년 강계 공귀리석관묘, 1963년 의주 미송리동굴유적·웅기 굴포리패총 등이 있다.
수많은 유적발굴조사를 하고 보고서를 발표하는 한편 많은 논문과 저서를 출간하였다.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고조선의 위치비정설’과 『조선원시고고학』의 출간이다.
광복 이후 북한의 역사학계에서는 고조선의 위치에 대해 ‘재만주설(在滿洲說)’과 ‘재평양설(在平壤說)’로 갈리게 되었다. 이후 약 10여 년간 토론을 거듭하면서, 1961년 김석형(金錫亨)을 비롯한 이지린(李趾麟)·임건상(林健相)·이상호·백남운(白南雲) 등 많은 문헌사가들이 ‘재만주설’에 동조하였다.
이에 대한 도유호를 비롯한 황철산(黃鐵山)·정찬영(鄭燦永)·황욱(黃澳) 등 고고학자들이 주장하는 ‘재평양설’은 점차 소수설로 전락하게 되었다. 1963년에 개최된 토론회에 이르러서는 도유호 등의 ‘재평양설’은 마침내 사라지게 되고, 고조선의 ‘재만주설’ 만이 남아 북한학계의 정설이 되었다. 이 사건으로 도유호는 북한학계에서 설자리를 잃게 되었다.
한편, 1960년 그 때까지의 발굴조사를 통해 얻은 지식을 토대로 『조선원시고고학』을 출간하였다. 이 책은 아직 굴포리 구석기유적을 발굴 조사하기 전이어서 신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의 유적·유물에 관한 것만 담고 있는데, 우리나라의 원시고고학을 처음으로 체계화한 것이다.
그리고 즐문토기 유적은 신석기시대, 거석문화 유적은 청동기시대, 또 압록강·두만강유역의 유적은 초기철기시대로 각각 규정하고, 유적 상호간의 관계, 종족의 기원과 구성문제, 편년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시도가 많았다. 특히, 일본학자들의 금석병용기설을 수정한 것은 가장 큰 공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과 『지탑리원시유적발굴보고』·『궁산원시유적발굴보고』 3책으로 1961년 과학원으로부터 국가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러나 1963년 『조선원시고고학』에서 문화의 전파이론을 채용한 것은 변증법적 유물론에 위배되는 반동적 이론이라 하여 호된 비판을 받게 되었다. 이 비판이론이 그대로 북한학계의 기본원칙으로 굳어지게 되자, 도유호와 같은 넓은 시각은 영원히 사라지게 되고, 대신 편협한 국수주의이론이 원칙화되었다.
결국, 그는 철저한 공산주의자라기보다는 지식사회주의자 또는 민족주의자에 가깝다고 하겠다. 1965년 이후 북한학계에서 사라진 그에 대해 여러 추측이 있지만, 일설에 의하면 백두산 부근의 중학교로 쫓겨났다가 그곳에서 죽었다고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