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문 필사본. 낙질본(落帙本). 원래는 2권 2책이었던 듯하나, 현재 전하는 것은 「동유긔」 권1뿐이다. 작품의 내용으로 미루어볼 때 작자는 당시에 벼슬살이 중이었으며, 이미 연행(燕行) 경험이 있는 사람이다.
그의 할아버지와 형이 1826년(순조 26)에 금강산을 여행한 일이 있고, 아버지가 당시에 양주목사였다. 또 종암(鐘巖)에 묘소가 있고, 슬하에 병내·병하라는 아들이 있었으며, 삼종숙에 옥순이 있고, 대교(待敎)를 지낸 족질 병국과 판부사(判府使)를 지낸 족형이 있는 순조∼고종 연간의 생존자이다.
또한 이 작품이 쓰여진 연대는 여행일자의 간지(干支)로 보아 1853년(철종 4)인 듯하다. 모두 45장으로 되어 있으며, 한 장에 10행이 들어있고 매행의 글자수는 일정하지 않다.
내용은 삼신산(三神山)이 모두 우리나라에 있으며, 그 중에도 봉래(蓬萊)는 금강산임을 강조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이어서 금강산은 중국인들조차 한번 보고 싶다고 하였는데, 이 나라에 태어나서 어찌 못보고 평생의 한이 되게 할 것이냐면서 금강산 유람에 대한 강한 의지를 표명한다.
8월 17일 기축(己丑)에 글을 올려 임금님의 승낙을 받아 내려주신 말을 타고, 22일 갑오에 종자·겸인(傔人 : 청지기)·악공 등 4인을 거느리고 출발한다. 혜화문-양주관아-금화현-단발령 등을 거쳐, 장안사-설선당-표훈사-마하연-보덕굴-불지암-묘길상-비화담을 구경한 9월 2일 갑진(甲辰)까지만 전한다.
여기에는 많은 사원·지명 등의 연기설화(緣起說話)와 다른 사람의 한시 7수가 소개되고 있다.
낙질되어 전모를 볼 수 없는 점이 이 작품의 문학사적 가치를 떨어뜨린다. 그러나 권1만을 놓고 볼 때, 조선시대 국문본 금강산 기행문 3본, 즉 「동유기」·「금강유산일기」·「금강록」 중 가장 뛰어난 작품이다. 고려대학교 도서관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