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차회(無遮會)라고도 한다. 모든 사람들을 가리지 않고[無遮] 공양과 보시를 하는 법회로써, 인도 아쇼카왕이 시작하며 5년에 1회씩 법회를 열었다고 해서 오년법회(五年法會, pañcavarṣika)라고도 한다. 이 의식이 수륙재와 어떠한 관계에 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수륙재는 일명 수륙무차평등재의(水陸無遮平等齋儀)라 하여, 아무 차별 없이 누구에게나 그 공덕이 미치게 하는 것임을 밝히고 있다.
또, 수륙재를 여는 신앙적인 의미도 유주(有住) · 무주(無住)의 고혼(孤魂)에게 평등하게 공덕이 돌아갈 수 있게 한다고 인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수륙재는 무차대회의 한 종류로서 파악할 수 있다.
따라서, 무차대회는 어떤 신앙의례의 형식이나 절차보다는 모든 중생을 대상으로 그들에게 불법의 공덕이 두루 돌아가게 함은 물론, 물건도 골고루 나누어 주고 다 함께 즐기게 하는 법회의 성격을 띠게 되었고, 구체적인 신앙의례를 갖춘 것이 수륙재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현재 어떠한 법회양식으로 무차대회가 개최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이 때 불경을 강의하거나 불교의 이치에 대하여 각각 의견을 말하여 서로 배우는 절차도 있게 마련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무차대회가 940년(태조 23) 조정에서 신흥사(新興寺)에 공신당(功臣堂)을 신축할 때 공신들의 화상을 봉안하고 하루 동안 무차대회를 열었다고 한다.
또, 1216년(고종 3) 10월 미륵사(彌勒寺)의 공신당을 중수한 뒤 다시 무차대회를 성대하게 열었다. 신흥사와 미륵사에서의 무차대회는 그 뒤 그 규모는 달라졌으나 대체로 왕실이 주관하는 국가의 연중행사로 발전되어 갔다.
또, 광종이 때때로 귀법사(歸法寺)에서 크게 무차대회를 열어 잔치를 베풀고 물품을 나누어 주었던 것과, 1165년(의종 19) 1월 왕이 시주가 되어 궁중에서 무차대회를 열었던 것 등은 모두 불교의 보시정신(布施精神)에 입각한 것이다.
이 무차대회의 또 다른 목적은 널리 민심을 수렴하는 데 있었다. 국왕 또는 국가가 시주가 되어 공신당에서 연중행사인 무차대회가 열렸음은 공신들의 명복을 비는 한편, 국민을 국가에 봉사하게 함으로써 널리 민심을 다스렸다는 데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조선시대에 와서도 국행(國行)으로 여는 수륙재는 중종 때까지 계속되나 무차대회라는 명칭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명종 때 회암사(檜巖寺)를 중수하고 보우(普雨)가 발원하고 문정왕후(文定王后)가 시주하여 무차대회가 개최되었을 뿐이다.
이를 통해서 볼 때, 무차대회는 수륙재보다 재의(齋儀)의 규모를 더 크게 하고 더 많은 사람들에게 불덕(佛德)을 고루고루 나누게 한다는 의미를 더욱 강하게 지닐 때 붙여진 이름임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