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학대사 설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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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비문학
작품
고려 말에서 조선 초기의 도승인 무학대사에 관한 설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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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고려 말에서 조선 초기의 도승인 무학대사에 관한 설화.
내용

『순오지』·『지봉유설』·『연려실기술』에 이성계(李成桂)의 꿈 해몽에 관련된 단편적인 일화가 전해지며, 구전설화는 전국적으로 전승되고 있다. 설화의 내용은 ① 출생담, ② 출가담, ③ 이성계와의 관련담으로 분류할 수 있다.

출생 설화는 무학의 어머니가 빨래를 하러 갔다가 물에 떠내려오는 오이를 먹고 처녀로서 아이를 잉태하여 낳게 되자, 그 부모가 아비 없는 아이라고 내다 버렸다. 그런데 학이 날개로 보호하여 아이가 구출되었다는 것이다.

출가 이유에 대한 이야기는 여러 가지이지만 출가 이후 동자승 시절에 있었다는 해인사 화재 진압 일화는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무학이 상추를 씻으러 냇가에 갔다가 해인사에 불이 난 것을 알고 물을 뿌려 불을 껐는데, 그 사실을 의심한 스님이 직접 해인사에 가서 그것을 확인하였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민간에 가장 잘 알려진 「무학대사설화」는 이성계를 만나 조선왕조의 창업에 관여하게 된 이성계 관련 설화이다. 여기에는 「석왕사유래담」과 「무학을 꾸짖어 깨우쳐 준 농부」가 대표적인 유형으로 꼽힌다.

「석왕사유래담」은 『순오지』·『지봉유설』·『연려실기술』에 실려 있으며 구전설화로도 전해지는데, 이성계가 등극하기 전에 꾸었다는 꿈을 왕이 될 것이라고 해몽하였다 하여 지어진 절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에 못지 않게 잘 알려진 것이 「무학을 꾸짖어 깨우쳐 준 농부」 이야기이다. 태조가 서울을 옮기기 위하여 무학에게 도읍 터를 구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무학이 한양 땅을 도읍 터로 정한 뒤 대궐을 지으려고 여러 번 시도하였으나 번번이 허물어지고 말았다.

상심한 무학이 어느 곳을 지나는데, 어떤 노인이 논을 갈면서 소를 나무라기를, “이랴, 이 무학이보다 미련한 놈의 소!”라고 하였다.

놀란 무학이 노인에게 까닭을 물었더니, “한양 땅이 학(鶴)터인데 등에 무거운 짐을 실었으니 학이 날개를 칠 것 아니냐. 그러니까 궁궐이 무너진다. 성부터 쌓으면 학의 날개가 눌려져 꼼짝 못하므로 대궐이 무너지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무학이 그 말대로 하니 대궐이 완공되었다. 그 노인은 삼각산 산신령이었다고도 한다.

이 유형은 무학이 도읍 터를 정하기 위하여 방황하고 있는데 어떤 노인이 “십 리만 더 들어가라.”고 해서 가 보았더니 좋은 터를 발견하였다고 하는, 왕십리유래담으로 변이되어 있기도 하다.

무학대사의 출생담은 영웅의 일대기에서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비정상적인 잉태와 기아(棄兒) 및 원조자에 의한 구출 동기와 일치한다. 이러한 요소는 도선(道詵)과 범일(梵日)의 출생담과 유사한 것으로, 해인사 화재 진압 설화와 함께 그의 비범성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

「무학대사설화」 중 가장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이성계와 관련된 설화이다. 이러한 설화는 조선조 창업을 천명(天命)에 의해 이룩한 정당한 것으로 부각시키려는 조선 왕조 지배층의 의도를 보여주는 것으로, 사회적 의미를 지닌 것이다.

참고문헌

『순오지(旬五志)』
『지봉유설(芝峯類說)』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한국구비문학대계』(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0∼1986)
『한국민간전설집』(최상수, 통문관, 1958)
집필자
최내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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