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법론을 흔히 문법이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문법이란 언어현상에 내재하고 있는 일정한 질서로서의 규칙을 이르는 말이고, 문법론이란 그러한 문법을 연구하는 학문을 이르는 말이다.
한 언어의 문법을 구명하는 데는 몇 가지 다른 길이 있을 수 있지만, 특히 규범문법적 태도와 기술문법적 태도를 구별하는 것이 중요하다. 규범문법은 학교문법이라고도 하는데, 말이나 글을 어떻게 써야 하고 어떻게 쓰면 안 된다고 하는, 옳고 그름의 규범을 전제로 한다. 반면에 기술문법(記述文法)은 어떻게 써야 옳은가 하는 규범을 전제로 하지 않고, 나타난 현상을 있는 그대로 기술하는 문법으로서 학문문법이라고도 한다.
국어의 문법연구, 즉 문법론의 연구사를 통해서 볼 때, 대체적으로 연구의 초기에는 규범문법적 태도가 우세하였으며, 점차적으로 기술문법적인 태도가 지배적으로 되어가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이를테면, 유길준(兪吉濬)의 ≪대한문전 大韓文典≫(1909) 등에서는 문법을 바르게 쓰고 바르게 말하는 기술(技術)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국어를 중심으로 한 문법연구의 경험이 쌓이게 됨에 따라 최현배(崔鉉培)의 ≪우리말본≫(1937)에서는 “어느 나라의 말에든지 제각기 일정한 본이 있나니, 그 본을 말본이라 하며……”와 같은 정의가 내려졌다. 이는 문법을 한 언어에 내재하고 있는 일정한 질서로 규정한 것이다.
한편, 문법이론과 연구방법이 정밀화됨에 따라 “단어가 서로서로 관계를 맺어서 글월을 이루는 법칙.”(이희승, 초급국어문법, 1949)으로 문법을 정의하기에 이르렀다. 이는 문장구성의 질서를 문법이라고 본 것이다. 한편, 우리 문법학자 중에는 박승빈(朴勝彬)처럼 문법을 “화자가 자기 모국어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무의식적인 지식”(朝鮮語學, 1935)으로 규정하기도 하였다.
이는 문법을 우리 나라 사람이 우리말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능력으로 간주한 것이다. 이런 문법관은 1970년대를 전후하여 활발하게 전개되어온, 변형생성문법이론에 의한 국어문법연구가 표방한 것이기도 하다.
이렇게 우리의 문법학자들은 문법을 언어현상에 내재하여 있는 질서뿐만 아니라 우리가 우리말에 대하여 지니고 있는 능력 내지 지식으로도 간주해 왔음을 확인할 수 있다. 우리 나라의 문법연구는 국어문법연구가 중추를 이루고 있다고 할 수 있으나, 영어·일본어·중국어·한문 등 외국어 문법에 대한 업적도 상당하며 이론문법을 전개한 업적들도 발굴할 수 있다.
국어문법연구 분야는 우선 시간과 공간의 관점에서 나누어볼 수 있다. 시간적으로는 현재 우리가 쓰고 있는 현대어를 중심으로 한 현대어문법, 15세기 국어를 중심으로 한 중세어문법, 그밖에 고대로 거슬러 올라갈 때의 고대어문법, 17, 18세기의 국어자료를 대상으로 한 근대어문법 등 일정한 시기에 대한 공시적 문법(共時的文法)이 성립되어 있으며, 이들을 종(縱)으로 이어 통시적(通時的)으로 연구하는 역사문법, 곧 문법사(文法史)가 성립되어 있다.
한편, 공간적 관점에서는 서울방언을 중심으로 한 공통어문법과 동남방언·서남방언·중부방언·영동방언·동북방언·서북방언·제주방언 등을 대상으로 한 방언문법이 성립되어 있고, 이들을 횡(橫)으로 잇는 현대방언비교문법이 가능하다.
나아가서 국어와 계통적으로 친족관계에 있다고 일컬어지는 몽고어·퉁구스어·터키어 등 여러 언어들과의 비교문법이 시도되고 있다. 모든 언어들이 궁극적으로 어떤 동일한 규칙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이론 위에서 언어보편성을 추구하는 입장의 문법, 즉 일반문법 내지는 보편문법의 성립도 논의될 수 있다.
우리 나라에서 가르쳐지고 있는 외국어에 대해서도 국어문법론의 경우와 같이 각 분야에 걸친 연구가 가능하지 않은 바 아니나, 그러한 작업은 우리의 힘이 아직 미치지 못하는 처지에 있다. 이들 외국어에 대해서는 효과적인 언어학습에 대비한다는 뜻에서 국어문법구조와의 차이점을 구명하는 대조문법(對照文法)이 성황을 이루고 있다. 외국어 학습이 아니라 하더라도 국어와 다른 언어를 비교함으로써 문법구조상의 유사성을 찾아낼 수 있는데 이는 언어유형론에 크게 기여할 수 있다.
문법론의 뜻을 넓게 잡으면 언어현상 전반을 연구하는 언어학과 같은 뜻으로 사용할 수 있다. 더욱이 변형생성문법이론은 음운현상은 물론, 단어의 의미까지 문법의 영역에 끌어들이려고 하고 있다. 그러나 관용적으로는 단어의 짜임새와 문장의 구성방식을 문법의 연구대상으로 한정하는데, 여기에서도 이러한 입장을 취하기로 한다.
좁은 의미의 문법론은 형태론(形態論)과 통사론(統辭論)으로 양분되는데, 형태론은 단어의 짜임새를 대상으로 하고, 통사론은 문장의 구성방식을 대상으로 한다. 문법연구는 형태소가 어떻게 결합하여 단어를 이루며, 그러한 단어가 어떤 방식으로 결합하여 문장을 형성하는가를 구명하는 것을 궁극적인 목표로 삼지만, 단어의 구성성분이나 문장의 의미를 밝히는 일도 문법연구의 대상이 된다. 곧, 형태적 측면과 의미의 측면이 연구대상이 되는 것이다.
형태에 관한 연구는 표면적 양상을 중시하는 기술도 있을 수 있고 심층적 양상을 중시하는 설명방법도 가능하다. 이러한 문제는 문법관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지만, 최근에는 문법구조를 심층구조와 표면구조의 두 측면에서 분석하는 일이 보편화되고 있다. 의미를 서술하는 마당에서도 두가지 접근방법이 가능하다. 표면상으로 보고 얻게되는 형식적 의미의 서술에 국한할 수도 있고 화자의 태도나 현실적 요인을 고려하는 실용적 관점의 해석도 있을 수 있다.
우리나라의 문법연구는 19세기 전반기에 서양인에 의하여 본격적으로 착수되었다. 그러나 그 이전에도 문법연구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이두·향찰 등의 차자자료(借字資料)를 보면 의미부와 형태부에 대한 의식이 고도로 발달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으며, 이런 점은 15세기 한글자료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한문 수용과정에서도 그런 사실이 목격된다. 중세어의 한글문헌은 대부분 한문 원문에 토를 붙인 구결문을 징검다리로 삼아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구결을 단다는 것은 한문의 구문법(構文法)에 대한 철저한 지식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구결문과 번역문은 우리의 한문에 대한 구문의식의 소산으로 해석될 수 있다. 한자(어)를 우리말로 옮길 때는 품사에 따라 일정한 석의방식(釋義方式)이 채택되어 있는데, 이는 당시 사람들의 한자 내지 우리말에 대한 품사의식이 드러난 것으로 이해된다.
또, 조선 후기의 역학자(譯學者)들은 형태부에 대한 인식을 명확히 하고 그것에 일정한 문법적 명칭을 붙이기도 하였는데, 이런 일들은 서양인에 의한 연구 이전에도 우리들 나름의 문법연구의 전통이 있었음을 알려준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들은 체계적으로 면면히 연구되었다는 자취를 남기고 있지 못하므로 본격적인 문법연구라고 할 수 없다.
이런 점들을 고려할 때 우리의 문법연구 전통은 서양인에 의하여 확립되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처음으로 국어문법을 연구한 이는 독일인 지볼트(Siebold,F.von)였다. 그는 1832년 ≪일본의 기술에 관한 연구 Archiv fur Beschreibung von Japan≫라는 책자 가운데서 전라도 방언을 중심으로 국어문법을 서술하였다. 이어 프랑스인 로우니(de Rosny,L.)·리델(Ridel,F.), 영국인 로스(Ross,J.), 미국인 언더우드(Underwood,H.G.)에 의하여 국어문법이 체계적으로 기술된 바 있다.
이 가운데서 대표적인 업적은 리델의 ≪조선어문법 Grammaire Co○enne≫(1881)과 언더우드의 ≪한영문법 An Introduction to the Korean Spoken Language≫ (1890)이다. 우리 나라의 영문법연구도 19세기말경에 태동한 것으로 보인다. 언더우드 문법서의 제2부는 영문법을 서술하고 영어문장을 우리말로 옮기는 법을 제시한 것인데, 이는 우리나라 사람을 위한 영문법의 구실을 한 것으로 생각된다.
더욱이, 이 시기에는 영미인에 의한 한영사전과 영한사전, 그리고 한영대역회화서가 여러 종류 간행되기도 하여 우리들의 영어학습 및 영문법연구의 터전을 만들어 놓기도 하였다. 이 당시에는 일본인 호세코(寶迫繁勝)에 의하여 한국어 교습서가 나오기도 하였는데 서양문법의 영향을 받은 당시의 일본문법의 체계에 준거하여 국어문법을 서술하고 있다.
갑오경장(1894)은 우리나라 사람에 의한 국어문법연구의 시발점이 된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를 띠고 있다. 갑오경장 이전은 서양의 선교사나 외교관들이 주로 실용적 목적에 공헌하기 위하여 국어문법을 연구하였지만, 갑오경장 이후는 우리들 자신의 손으로 국어문법을 연구하고 교수하는 기풍이 크게 조성되었다.
갑오경장으로부터 20세기초까지는 국어문법연구의 준비기간이었다. 이때를 전후하여 국어문법을 연구한 사람들은 유길준(兪吉濬)·주시경(周時經)·김규식(金奎植)·김희상(金熙祥)이었다. 이들은 나라 안 또는 나라 밖에서 국어문법을 연구하여 교육현장을 이용하거나 유인형태(油印形態)의 책자를 통하여 그 적당함과 부적당함을 시험하기도 하였는데, 이것들이 인간(印刊)된 것은 1908년부터 1910년의 3년 사이였다.
이 시기의 국어문법은 19세기에 성황을 이루었던 서양인의 국어문법연구와 일본문법 및 영문법의 영향을 받아 그 체계가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 가운데서 대표적인 업적은 유길준의 ≪대한문전≫(1909)과 주시경의 ≪국어문법 國語文法≫(1910)인데 이들은 여러 차례의 원고를 고치는 과정을 거쳐 간행된 것이다. 특히, 주시경의 저술은 1898년에 얼개가 잡힌 이후 여러 강습기관을 통하여 부단히 체계와 용어를 가다듬은 끝에 나온 것이다.
주시경의 문법이론은 다른 문법학자와는 달리 창의적인 면이 강하여 현대적인 관점에서 새로이 평가되고 있다. 그는 의미론과 화용론(話用論, pragmatics)에 바탕을 둔 통사이론을 전개하고 있는데, 이는 최근의 국어문법이 지향하는 방향과 근본적으로 일치한다.
대한제국시대의 문법학자들은 우리말과 우리글을 연구하는 것이 독립을 유지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믿고 있었다. 더욱이, 주시경의 문법은 국문연구소(國文硏究所)의 설치에 따르는 일반의 국어연구열에 부응하기 위하여 저술되었으며, 이후의 국어문법연구의 실질적 출발점이 되었다는 점에서 학술사상의 위치가 크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시기에는 전세기에 왕성하였던 서양인들의 연구는 한걸음 물러서고 일본인들의 문법연구가 왕성하였으니, 마에마(前間恭作)의 ≪한어통 韓語通≫(1909)과 다카하시(高橋亨)의 ≪한어문전≫(1909)이 대표적이다. 이렇게 일본인들의 연구업적이 많이 출간된 것은 그들의 정한정책(征韓政策)과 관련하여 해석할 수 있다. 이 시기의 외국어 문법에 대한 업적은 우리들이 저술한 일본어 문법이 몇 가지가 있고 중국어 문법도 눈에 띄나 영문법은 아직 특별한 것이 발견되지 않는다.
일제강점기의 문법연구는 1933년 한글맞춤법의 제정을 갈림길로 하여 전기와 후기로 나누어진다. 전기(1911∼1933)의 문법연구는 대한제국시대에 겨냥되었던 어문정리사업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하는 방향으로 수행되었다.
국권이 상실됨에 따라 전대에 ‘대한(大韓)’ 또는 ‘국어(國語)’로 시작되던 책의 이름이 ‘조선(朝鮮)’ 또는 ‘조선어(朝鮮語)’로 바뀌어 나타났다. 대표적인 것이 주시경의 ≪國語文法≫이 ≪朝鮮語文法≫으로 바뀐 점이다. 그는 조선어강습원(朝鮮語講習院) 등의 강습기관을 통하여 이 책의 부족한 점을 보완하고 ≪말모이≫라고 부르는 국어사전의 편찬을 주도하는 등 계속 국어문법연구에 정진하였으나 요절하고 말았다.
주시경이 죽은 이후 주시경의 후계학파인 김두봉(金枓奉)·이규영(李奎榮)·이상춘(李常春)·김윤경(金允經)·신명균(申明均)·최현배 등이 국어문법연구의 주류를 이루었다. 이밖에 주시경학파에 반기를 든 안확(安廓)·박승빈(朴勝彬) 등도 있었고 이완응(李完應)과 같이 일본 문법학자 다카하시의 문법체계를 따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홍기문(洪起文)과 같이 자기나름의 특수한 문법이론을 전개하는 일도 목격할 수 있었다. 이 가운데서 가장 뚜렷한 업적을 남긴 사람은 김두봉과 최현배이다.
김두봉은 그의 스승인 주시경의 ≪국어문법≫의 체계를 원칙적으로 준수하는 태도를 지니면서 부족한 점을 바로잡아서 실용성을 띤 문법을 저술하였는데, ≪조선말본≫(1916)이 그것이다. 이 책은 1920년대는 물론이고 최현배의 문법이 자리잡는 1930년대까지 뿌리를 굳히고 있었으며, 1950년대의 김윤경의 문법에서도 그 여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최현배는 1930년 <조선어품사분류론 朝鮮語品詞分類論>을 발표하여 이른바 제2유형의 문법체계를 주장하였다. 즉, 주시경·김두봉은 용언의 어간과 어미를 분석하여 따로따로 단어의 자격을 주었으나, 최현배는 나누지 않고 전체를 한 단어로 처리하였다. 최현배의 이론을 종합적 설명법이라고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최현배의 문법체계는 1933년에 제정된 <한글맞춤법>의 이론적 지주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1963년에 공포된 <학교문법통일안>에까지 뻗쳐 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매우 크다.
이 시기에 특기할 것은 일본인들에 의하여 중세어를 중심으로 한 국어의 역사문법이 연구되기 시작하였다는 사실이다. 마에마·오구라(小倉進平)는 각각 ≪용비어천가≫의 주석과 향가해독을 통하여 중세어와 고대어의 문법적 사실을 드러내려는 노력을 보이고 있다. 이 시기의 서양인의 업적으로 주목이 되는 것은 에카르트(Eckardt,A.)가 저술한 ≪조선어교제문전 朝鮮語交際文典 Koreanische Konversationsgrammatik≫(1923)인데 이 책에서는 다음 시기의 최현배의 ≪우리말본≫(1937)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 시기의 외국어문법연구로 주목할 만한 것은 영문법이 처음으로 저술된 사실이다. 이기룡(李起龍)의 ≪중등영문법 中等英文法≫(1911)과 윤치호(尹致昊)의 ≪영문법첩경 英文法捷徑≫(1911) 등 4종류의 영문법서적이 출간되었다. 이러한 업적들은 19세기 후반기에 나왔던 영미인들의 한국어 문법서나 사전·회화서 등이 밑거름이 되어 이룩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한문문법이 처음으로 여러 종류 나오고 중국어 문법서도 볼 수 있다. 국제어인 에스페란토의 문법이 2권이나 저술되었으니 영어에 이은 두번째의 서양어 문법서가 되는 것이다. 또, 우리나라 사람이 쓴 일본어 문법서가 얼굴을 드러내게 되는데 이런 일은 대한제국 말엽부터 확인된다.
후기(1934∼1945)에는 최현배의 문법체계에 근거한 <한글맞춤법통일안>이 공포되었으며, 이듬해인 1934년에 ≪중등조선말본≫이 간행되었다. 이는 <한글맞춤법통일안>의 이론적 지침서라고 할 수 있는데, 1930년에 발표된 문법체계에 따라 국어문법 전반을 체계적으로 저술한 것이다. 최현배는 또 ≪중등교육조선어법 中等敎育朝鮮語法≫(1936)을 저술하기도 하였으며, 1937년 역저 ≪우리말본≫을 간행하기도 하였다.
한편, 주시경학파에 의하여 조직, 운영되던 조선어학회(朝鮮語學會)와 대립하여 독특한 맞춤법 이론을 편 바 있는 박승빈은 ≪조선어학 朝鮮語學≫(1935)을 저술하였다. 이로써, 우리는 우리말 규범문법을 정립할 수 있는 두 종류의 학술적 문법서를 갖추게 되었다. 이 시기에 위의 두 문법학자 이외 몇 사람이 문법서를 저술하기도 하였으나 큰 특색이 있는 것 같지 않다.
이 시기에 와서 국어문법연구가 고개를 숙이게 된 것은 맞춤법통일안의 작업이 일단락된 것과 관련이 있겠으나, 1940년대를 넘어서면서 문법적 업적이 거의 없다시피 된 것은 일제의 조선어말살정책에 직접적 원인이 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외국인의 국어문법연구는 특기할 것이 많다.
람스테트(Ramstedt,G.J.)의 ≪조선어문법 A Korean Grammar≫(1939)은 이전의 선교사들의 업적을 기초로 하여 역사언어학적 관점에서 국어문법구조 전반에 대하여 서술한 것으로 이후의 나라 안팎의 국어학 내지 국어문법연구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이밖에도 독일인 로트(Roth,P.L.)와 재미 한국인들에 의한 문법적 저술도 몇 가지 보인다. 외국어는 라틴어 문법서가 처음으로 나오고 중국어 문법서도 보인다.
광복 이후 문법연구는 1963년의 <학교문법통일안>의 공포를 분수령으로 하여 두 시기로 나누어지며, 그 이후는 형태론 연구와 통사론 연구로 적절히 나누어 고찰할 수 있다.
전기(1945∼1950)는 8·15 광복으로부터 6·25까지의 5년간으로서 전대에 기초가 닦아졌던 규범문법을 실제의 교육에 적용함으로써 타당성 여부를 시험한 시기로 규정할 수 있다. 국어문법교과가 중등학교 교육과정에 정식으로 채택됨에 따라 여러 종류의 문법교과서가 쏟아져 나왔다. 그러나 광복 이전 주로 1930년대에 나왔던 문법교과서를 중판하거나 그때에 세워진 문법체계를 바탕으로 서술된 것이 대부분이었다. 급박한 문법서의 수요에 응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 가운데서도 정열모(鄭烈模)의 ≪신편고등국어문법 新編高等國語文法≫(1946)은 이전의 문법학자들이 단어의 자격을 주었던 조사까지도 명사의 일부로 처리하여 극도의 종합적 체계를 탄생시킴으로써 국어문법연구사상 새로운 기원을 그어 놓았다고 할 것이다. 이미 일제강점기에 체계가 얽어진 홍기문의 ≪조선문법연구 朝鮮文法硏究≫(1947)와 김윤경의 ≪나라말본≫(1948)은 이 기간의 중요업적으로 평가될 수 있으며, 정인승(鄭寅承)의 ≪표준중등말본≫(1949)과 이희승(李熙昇)의 ≪초급국어문법≫(1949)도 특징있는 문법서로 간주된다.
이 시기에는 1920년대부터 일본인들이 독점하고 있었던 중세국어를 중심으로 한 국어역사문법의 연구가 우리들 자신의 손으로 연구되었다. 광복 이전 오구라의 향가해독을 수정한 ≪조선고가연구 朝鮮古歌硏究≫(1942)를 통하여 국어의 역사문법연구에 힘을 기울인 양주동(梁柱東)은 ≪여요전주 麗謠箋注≫(1947)를 통하여 중세어 문법구조의 대체적인 모습을 보여주었고, 광복 이전에 국어음운사연구에 선편(先鞭)을 쥐었던 이숭녕(李崇寧)은 ≪고어(古語)의 음운(音韻)과 문법(文法)≫(1949)을 통하여 중세어의 문법사실을 어느 정도 체계적으로 굽어볼 수 있도록 하였다.
일본학자 고노(河野六郎)는 중세어의 시제에 관한 논문을 여러 편 발표함으로써 중세어문법을 보다 과학적으로 연구할 수 있는 바탕을 구축하기도 하였다. 중등학교에서 영어는 제1외국어, 독일어는 제2외국어로 채택됨에 따라 이 방면에 대한 문법서가 나오기 시작하였다.
후기(1951∼1963)의 큰 특징은 전기에 교육현장에서 실용화가 모색되었던 규범문법이 통일, 공포되었다는 점이다. 문법체계, 특히 품사체계가 문법서에 따라 다르고 문법용어가 우리말과 한자어의 두 가지로 허용되어 있다는 것은 학습자에게 큰 부담이 되었고, 대학입학고사 등의 응용화의 단계에서는 문제가 적지 않다는 사실이 지적되자 교육계·문화계에서는 학교문법의 통일을 부르짖는 소리가 높아갔다.
이에 문교당국은 전문위원회를 만들어 1963년에 9품사를 골격으로 한 문법체계와 문법용어를 통일, 공포하기에 이르렀다. 특히, 이 시기에는 지정사 ‘이다’, 존재사, 조사의 처리를 둘러싸고 열띤 논전이 벌어졌는데, 이러한 진통을 겪는 동안 국어품사론과 형태론의 중요문제들이 깊이 있게 파헤쳐지는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이 시기는 광복 이후 우리들 자신의 손으로 넘어온 중세어의 문법연구가 본격화되기도 하였다. 겸양법 ‘ᄉᆞᆸ’, 아어형(雅語形) ‘오/우’의 기능이 허웅(許雄)·오에(大江孝男)·이숭녕·전재관(全在寬)·안병희(安秉禧)·김형규(金亨奎) 등에 의하여 분석되기도 하였는데, 이 두 문제를 둘러싸고 전개된 논의는 중세어문법의 경험적 방면과 이론적 측면을 심화, 발전시키는 데 큰 몫을 하였다.
이숭녕의 ≪중세국어문법 中世國語文法≫(1961)의 간행은 1920년대부터 연구되어온 중세국어문법연구가 체계적으로 종합, 서술되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매우 크다고 하겠다. 또, 이기문(李基文)의 ≪국어사개설 國語史槪說≫(1961)에서는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국어문법사의 서술이 시도되기도 하였다.
이 시기에는 북한과 소련에서도 국어문법연구가 활발하였다. 북한 과학원언어문학연구소에서 펴낸 ≪조선어문법 1·2≫(1960·1963)와 홀로도비치 (Xolodovich,A.A.)의 ≪한국어문법개론 Ocherk grammatici Korejskogo jazyka≫ (1954)이 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 시기에는 유럽과 미국의 중요한 언어학 이론서가 번역되기도 하였는데, 이들을 통하여 우리는 기능주의문법이론과 기술문법의 방법론을 익힐 수 있게 되었다.
국어형태론 연구는 주시경의 ≪말의 소리≫(1914)에서 그 터전이 잡혔다고 할 수 있으나 더 이상 계승, 발전되지 못하였으며 대개는 품사론의 테두리 안에서 취급되어왔으므로 국어의 형태적 구조가 선명히 드러나지 못하였다. 국어형태론 연구는 1950년대 후반기에 첫걸음을 내디디기 시작하여 1970년대 중반기에 어느 정도 결실을 맺었다고 할 수 있다.
규범문법의 확립을 위한 노력이 계속되는 1950년대의 후반기에는 기술적 언어분석의 방법론을 적용함으로써 국어형태론을 정립하려는 움직임이 매우 활발하게 일어났다. 형태소(morpheme)·자립형식(free form)·구속형식(bound form)의 개념을 끌어들임으로써 국어 단어의 개념을 면밀하게 규정하려는 시도가 장하일(張河一)에 의하여 일어났으며, 김민수(金敏洙)·이남덕(李男德)·허웅 등도 이러한 방면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이 방법은 중세어의 문법연구에 큰 영향을 미친 바, 안병희에 의하여 중세어의 어간의 모습이 선명하게 드러나게 되었다. 또, 그는 중세어의 의문법과 존비법(공손법)의 체계를 정립하기도 하였는데 이러한 성과 역시 기술문법의 방법을 원용한 것이다. 구조적 기술문법은 이미 번역을 통하여 이 땅에 선을 보였던 기능주의 문법이론과 함께 국어형태론 연구를 진작시키는 데 큰 공헌을 하였다고 할 수 있다.
고영근(高永根)은 두 이론을 발판으로 삼아 현대어의 어미부를 분석하여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문제를 깊이 있게 논의하였다. 마틴(Martin,S.E.)의 ≪한국어형태음소론 Korean Morphophonemics≫(1954)은 기술적 언어분석법에 따라 국어의 형태구조를 분석한 것인데, 이 책은 나라 안의 국어형태론은 물론, 특히 미주(美洲)에서 이루어진 국어통사론연구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1960년대 후반기에는 형태론 연구가 자리를 잡게 되어 많은 형태론적 사실들이 모습을 드러내거나 다시 해석되는 성과를 거두었다. 현대어의 조사에 대한 형태론적 분석이 고영근과 김민수에 의하여 시도된 것을 필두로 하여, 합성어의 직접구성성분분석이 이익섭(李翊燮)·성기철(成耆徹)·김석득(金錫得) 등에 의하여 이루어지고 한자어의 조어법적 특징이 이익섭·김종택(金宗澤) 등에 의하여 구명되었다.
그리고 파생접사의 식별기준, 파생어의 형태음소론과 그 기술방법이 고영근·김계곤(金桂坤) 등에 의하여 이루어졌으며, 현대어의 조어법 전반이 김계곤에 의하여 다루어졌다. 또한 고영근은 현대어의 어미구조체에 대한 관심을 계속 표명함으로써 선어말어미와 어말어미를 구획하는 기준을 정립하였으며, 어말어미 전반을 분석함으로써 종결어미와 비종결어미의 체계화를 추구하였고, 의존명사의 변별기준을 세우고 인접형식과의 통합관계를 다루었다.
이 시기의 형태론연구로서 주목할 것은 허웅에 의하여 중세어의 형태론 전반을 체계화한 ≪우리옛말본≫(1975)이 나온 점이다. 이 업적은 20여년에 걸친 그의 중세어 문법연구의 결산적 보고라고 이를 만한 것인데, 이 업적에 의하여 우리는 한동안 잠잠해 있던 중세국어의 문법연구를 진작시킬 수 있는 터전을 얻게 되었다.
또한, 이 시기의 주목할 만한 업적으로서 이승욱(李承旭)의 ≪국어문법체계(國語文法體系)의 사적연구(史的硏究)≫(1973)를 들 수 있는데, 중세어의 격체계를 비롯하여 경어법과 시상법(時相法)의 체계 및 그 변천이 깊이 있게 다루어져 있다. 레빈(Lewin,B.)은 ≪한국어동사형태론 Morphologie des Koreanischen Verbs≫(1970)을 내었는데, 우리나라의 형태론연구는 물론 소련지역의 연구결과까지 종합되어 있다.
국어의 통사론 연구는 주시경의 ≪국어문법≫에서 현대적 의미의 이론과 방법론이 구축된 바 있으나, 체계적으로 전승되지 못하였고 성분과 문장의 종류를 가르는 서양의 전통문법의 방법론이 주류를 이루어왔다. 이러한 연구방법을 반성하고 새로운 방향을 잡게 된 것은 1960년대 후반기에 통사론 이론, 특히 변형생성이론이 도입되면서부터였다. 이러한 연구도 1972년을 경계로 두 시기로 나뉜다.
변형생성이론이 이 땅에 정식으로 알려진 것은 1965년이었고, 이에 의한 국어분석의 결과는 이홍배(李鴻培)의 업적(1966)을 시발점으로 송석중(宋錫重)·이맹성(李孟成)·국응도(鞠應道)·양인석(梁縯錫)·오준규 등의 업적으로 이어졌다. 이들은 모두 미주 등지의 대학에서 이루어진 박사학위논문으로 영어로 발표된 것들이다. 이렇게 외국에서 연구된 결과가 나라 안으로 들어오고 촘스키(Chomsky,N.)의 ≪통사구조 Syntactic structures≫(1957)가 번역되거나 이의 특성이 해설, 소개됨에 따라 국어학자들도 이 이론에 관심을 가지는 일이 늘어나게 되어 1971년에는 ‘문법연구회’가 탄생되는 등 움직임이 활발하였다.
1972년까지의 주류적인 경향은 통사론의 범위를 주로 문장에 국한시켜 국어문장구조의 구절구조규칙(phrase Structure rule)과 변형규칙(transformational rule)을 세움으로써 문장구성의 규칙을 형식화하는 일이었다. 다루어진 주제들은 이중주어·부정법·피동법·사동법·체언화·보문화·관계화 등이었는데 이들은 대부분 전통문법의 품사론에서 예사롭게 처리되던 것이었다. 이 시기에 김민수의 ≪국어문법론 國語文法論≫(1971)이 간행되기도 하였는데 전통구조문법의 결실을 바탕으로 하여 국어의 변형·생성문법을 전개하려는 노력을 발견할 수 있다.
후기의 통사론 연구는 국어문법에 이야기(text, discourse)의 개념을 도입한 장석진(張奭鎭)의 ≪한국어와 영어를 중심으로 한 화(話)의 생성적 연구≫(1973)로부터 비롯된다. 전기의 연구가 대부분 문장을 문법의 최대 단위로 삼은 데 대하여 이곳에서는 이야기에까지 범위를 확대하고 있다. 문법의 범위가 이야기의 수준으로 넓혀지면 이른바 화용론적 내지 기능론적 방법이 채택되는 것이다.
이러한 방법론은 주시경의 ≪국어문법≫에서도 목격할 수 있는데 1970년대에 이르러서야 화용론에 토대를 둔 통사론 연구가 다시 햇볕을 보게 된 것이다. 이러한 계열에 속하는 업적으로는 이정민의 ≪추상통사론과 영어에 관련시킨 한국어≫(1974)와 앞서 언급한 오준규의 업적을 들 수 있다. 이 방법에 의하여 다루어진 주제는 접속화·시제·동작상·서법·문체법·양태·경어법·특수조사·부사·대용표현 및 생략, 물음과 대답 등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시기에는 영문과 출신의 미주 유학파 중심에서 벗어나 국어학도들이나 다른 외국어학도들도 적극적으로 국어의 통사론 연구에 참여하는 양상이 목격된다. 남기심(南基心)의 ≪국어완형보문법연구≫(1973)와 서정수(徐正洙)의 ≪동사 ‘하’의 문법≫(1975) 등은 국어학도들이 변형생성이론을 도입하여 이루어낸 업적이다. 전기의 통사론 연구가 초기이론 내지 표준이론에 등을 대고 있다면, 후기의 연구는 생성의미론이나 해석의미론에 바탕을 두었다고 할만하다.
최근에 와서는 몬태규문법(범주문법)에 의거한 업적들도 크게 늘어나고 있는데, 대표적인 것으로 황종인과 이익환(李翊煥)·이환묵의 업적이 있다. 국어의 경어법을 사회적 내지 실용적 요인으로 설명하려는 움직임도 활발한데, 황적륜(黃迪倫)·박영순·조준학 등의 업적이 이에 속한다. 1970년대 후반부터는 변형생성이론을 중세어와 방언의 통사론 연구에 적용하려는 노력을 국어학도들에게서 볼 수 있다. 고영근의 ≪중세국어(中世國語)의 시상(時相)과 서법(敍法)≫(1981)은 주시경의 의미해석이론과 화용론에 바탕을 둔 문법이론을 적절히 이용하여 중세어의 시제와 동작상, 그리고 서법의 체계화를 시도한 것이다.
앞에서 중세어의 문법연구에서 ‘ᄉᆞᆸ’ ‘오/우’의 기능을 둘러싸고 열띤 논의가 전개되었다고 하였는데 1970년대에 들어와서는 이보다 더 폭넓고 깊이 있게 국어문법의 과제들이 논의의 대상이 되었다. 국어에는 부정법·사동법·양태소가 두 가지 형태로 갈려져 있는데 이들의 의미가 같으냐 다르냐 하는 문제가 큰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이는 궁극적으로 생성론자와 해석론자의 대결이 국어의 자료를 대상으로 전개된 것이지만, 국어이론문법의 값진 토대를 쌓은 것이라고 평가될 수 있다.
한편, 변형생성이론에 의한 국어문법의 토착화를 도모한다는 뜻에서 국어문법현상 전반을 체계화하려는 움직임이 고개를 들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작업은 문법연구회에서 회원들 상호간의 토론과정에서 성숙된 것인데, 그 결과가 이 모임의 학술지인 ≪문법연구≫를 통하여 발표되었다. 이 시기에는 이론문법의 연구가 본격화되기도 하였다.
촘스키의 ≪통사이론의 양상 Aspects of theory of Syntax≫(1965)을 비롯하여 많은 입문서와 전문서들이 번역되어 변형생성이론을 손쉽게 이해할 수 있는 바탕이 마련되었고, 외래문법이론을 비판적 각도에서 수용하려는 자세가 차차 자리를 잡아 갔다.
앞에서 대한제국시대부터 일본어·영어 등 외국어 문법연구가 초보적이나마 연면한 전통을 형성하여왔음을 보았는데 1960년대 후반에는 국어와 영어의 통사구조의 대조분석이 황찬호·김한곤·이계순·조준학 등 서울대학교 어학연구소 교수진에 의하여 시도되었고, 이는 다른 외국어와의 대조연구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1970년대 후반에 접어들면서는 외국어문법현상을 언어학적으로 연구하는 일이 늘어가고 있다. 영문법에 관해서는 이정민·김한곤·조성식 등의 업적이 있고 독문법에 관해서는 이병찬·신수송의 업적이 있다. 최근에 들어와서는 영어나 독어·프랑스어·일어 등을 대상으로 한 석사논문들이 나라 안에서 꾸준히 나오고 있어 외국어 문법연구도 국어문법연구와 보조를 같이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국어문법을 주축으로 하고 외국어문법과 이론문법까지 포괄하는 한국문법연구의 흐름을 살펴보았다.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 문법의 범위가 문장에서 이야기로 넓어지고 화용적 특성(話用的特性)을 중시하는 문법기술이 성행한 반면, 1960년대에 활발하게 전개되었던 형태론 연구가 고개를 숙이게 된 것은 불가피한 일이었다.
그러나 최근에 와서 형태론을 국어생성문법에 통합시키려는 시도가 부분적으로 일어나고 있으며, 더욱이 국어가 교착어(膠着語)라는 점을 감안할 때 이 방면의 연구는 방법론적으로 정밀화를 기할 필요가 있다. 최근 나라 밖에서는 그동안 문법의 범위 밖에 놓여 있었던 어휘론의 통합을 목표로 한 방법론 연마에 노력을 아끼지 않고 있는데, 이런 작업도 하루 빨리 수행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통시태(通時態)를 통합하는 문제와 방언의 문법사실을 공통어와 어떻게 관련시켜 기술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도 적극적인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국어문법연구의 시야를 확대시키는 데 있어서는 인접학문에 대한 깊은 지식을 쌓아야 하고, 국어와 구조적 친근성을 띠고 있는 일본어나 알타이 여러 언어에 대한 이해를 깊이해야 함은 물론, 오랜 세월을 두고 국어문법구조에 영향을 미친 고전한문과 중국어에 대한 이해를 새로이 하는 일도 도모해 봄직하다.
우리는 앞에서 주시경에 의하여 이론문법의 기초가 닦여져 있음을 확인한 바 있었는데, 외래문법이론을 과감히 수용하여 전통적인 문법이론과 접합하는 문제를 항상 마음에 지니고 있어야 한다. 이론문법을 세우는 데 있어서는 많은 언어에 대한 경험적 연구가 확립되어 있어야 한다.
학습의 필요성이 적거나 없는 언어라 하더라도 국어문법의 연구에 도움이 된다든지, 이론문법의 정립에 필요하다고 생각되면 언어학적 관점에서 연구하여야 함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이러한 깊고 넓은 바탕 위에 서야만 국어문법의 본질이 보다 선명히 드러나고 우리 나름의 문법이론의 개발도 가능해지리라 믿는다.
1980년대 이후의 국어문법연구도 생성문법의 강한 영향을 받으며 발전해 왔다. 특히 통사론 연구는 ‘지배·결속이론’으로 대표되는 수정확대표준이론에 근거하여 크고작은 문제들이 분석의 대상이 되었으며, 90년대를 전후하여는 ‘경제성이론’이 큰 영향을 미쳤고, 최근에 와서는 ‘최소주의이론’이 통사론연구의 이론적 지침이 되어 왔다. 이러한 연구는 생성문법연구회를 통하여 토론의 광장이 마련되고 있으며, 그 사이의 연구결과는 양동휘의 <문법론>(1994)에서 종합화가 이루어져 있다.
한편 오랫동안 생성문법의 통사부의 그늘에 묻혀 올바른 자리매김을 받지 못하던 형태부에 대한 중요성이 인식되면서 특히 단어의 형성을 중심으로 한 형태론 연구가 성황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연구는 음운론연구회를 중심으로 토론의 광장이 마련되어 왔으며, 전상범의 <형태론>(1995)에서 그 성과의 일단이 집약되었다.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는 형식성을 추구하는 생성문법의 연구와는 별도로 주로 텍스트 내지 담화 구조의 응집성과 응결성을 탐색하는 비형식문법의 연구가 성황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기운은 텍스트언어학회와 담화인지언어학회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는데 이는 문장문법 중심의 생성문법의 한계성을 극복하고자 하는 시대적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국어문법연구의 한 단면이다.
국어문법연구는 외래이론의 홍수 속에 휘말리기는 하였어도 언제든지 개화기 이래의 주시경 등이 쌓은 형태론 및 통사·의미론의 업적을 항상 딛고 발전해 왔으며, 특히 80년대에 접어들면서는 문법연구의 영역이 현대어에서 벗어나, 중세·근대·고대 국어의 방면으로 뻗어나고 있다. 이러는 도중에서도 그때그때마다 종합화가 이루어졌고 종합화를 위한 문법체계의 구성에도 많은 노력이 경주되었다.
1980년대 중반에는 20년 동안 검인정으로 발행되던 고등학교 문법교과서가 국정교과서로 편찬됨으로써 규범문법이 통일되었다. 이에 힘입어 맞춤법 등의 어문규범과 각급 학교 국어교육을 일관성 있게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곧 이어 중세국어를 중심으로 한 옛말에 대하여도 통일된 문법모형이 개발됨으로써 고등학교 고전교육의 정상화가 이루어졌다. 서정수의 <국어문법>(1994)은 현대문법에 대한 종합적 저술인데, 지금까지 나온 어떤 문법서보다 분량이 많고 체계를 갖춘 문법서이다.
남기심·고영근의 <표준국어문법론>(1985·1993)은 80년 중반에 열매를 맺은 학교문법의 체계를 이론적으로 뒷받침하는 저술인데 주로 현실언어생활을 계도(啓導)할 목적으로 쓰여진 실용 중심의 문법서이다. 고영근의 <국어형태론연구>(1989), 김석득의 <우리말형태론연구>(1992), 허웅의 <20세기우리말형태론>(1995), 김계곤의 <현대국어의 조어법연구>(1996), 김승곤의 <현대나라말본>(1996)은 대체로 현대국어의 형태론을 전개한 업적이며, 권재일의 <한국어통사론>(1992)는 현대국어의 통사구조의 해명에 중점을 두되 통사변화까지 아우르고 있다.
고영근의 <표준중세국어문법론>(1987·1997)은 학교문법의 옛말의 문법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하려는 의도에서 저술되었고, 허웅의 <16세기 우리 옛말본>은 그의 <우리 옛말본>(1975)에 이어 나온 16세기 국어에 대한 문법서술이다. 후자는 형태론만 다루었는데 전자는 형태론과 통사론을 포괄하였다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이승욱의 <국어형태사연구>(1997)는 형태변화만을 집중적으로 구명한 업적이다.
고영근의 <우리말의 총체서술과 문법체계>(1993)는 북한의 문법연구의 성과를 수용하는 관점에 서서 자소부와 형태부를 통합하는 등 문법체계를 다시 다듬고 공존규칙과 확대규칙에 기대어 우리말 문법현상의 변종을 한 그릇에 담아 총체서술하는 모형을 제안한 것이다.
북한은 60년대 후반 문화어운동의 전개 이후 이를 뒷받침하는 문법서가 많이 출간되었는데 80년대에 들어와서 얼굴을 내민 ≪조선어이론문법≫의 4부작 ‘단어조성론, 품사론, 형태론, 문장론’은 주체언어이론에 기대어서 열매를 맺은 문법저술인데 북한문법의 이론적 특수성이 집성되어 있다.
마틴(S.E.Martin)의 ≪한국어참고문법 A Referece Grammar of Korean≫(1992)은 남북한의 연구성과를 종합하는 관점에 서서 문자와 음성을 포함한 한국어의 문법구조 전반을 다룬 것으로 외국인의 한국어 학습의 참고문법으로 출판되었다. 80년대 이후의 국어문법의 업적은 석사·박사학위논문을 포함하여 수백편을 접할 수 있으며 그 영역도 현대·중세·고대국어에 걸쳐 있으며 국어학도뿐만 아니라 영문과 등의 외국언어학도의 기여도 적지 않다. 특히 최근에는 고려시대의 구결문법을 연구하는 기운이 구결학회를 중심으로 확산되고 있어 국어문법사연구에 새로운 계기가 마련되어 가고 있다.
21세기를 눈앞에 둔 현재의 처지에서 보면 국어문법연구는 현대어와 중세어의 테두리에서 벗어나 근대어와 고대어의 방면으로 시야를 넓히면서 국어문법구조를 해명하고 그 변천의 기제를 파악하는 방면으로 시야를 계속 넓혀 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우선 한 시대의 공시적 문법규칙을 우선적으로 파악해야 하며 이를 토대로 통시적 문법규칙을 세우는 태도를 지닐 필요가 있다. 단계를 밟으면서 유의해야 할 것은 총체서술에 당위성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총체서술의 성과가 집적되어 있어야만 문법구조의 특수성과 변화의 양상이 한 눈에 들어올 수 있으며, 이런 기초가 닦여 있어야만 우리의 언어생활도 올바로 통제될 수 있고. 문법교육 나아가서는 국어교육도 정상화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