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나부(貫那部) 출신으로 우태(于台) 관등을 갖고 있었다. 태조왕 80년(132) 왕의 아우인 수성(遂成; 후일의 차대왕)이 왜산(倭山)으로 사냥을 나갔을 때 그는 환나부(桓那部) 우태 어지류(菸支留), 비류나부(沸流那部) 조의(皂衣) 양신(陽神) 등과 더불어 수성에게 왕위 찬탈을 권하였다. 당시 수성은 국왕[태조왕]에게 적자가 있으니 그가 왕위를 잇는 것이 도리라며 사양하였으나, 미유는 현명한 동생이 형의 뒤를 이어 왕위를 잇는 경우는 옛날에도 있었음을 상기시키며 결단을 촉구하였다. 왕제 수성의 왕위 찬탈에 일종의 명분을 제공한 것이다.
이후 태조왕 94년(146) 7월 수성은 왜산에 사냥을 나갔다가 측근들에게 자신의 왕위 계승을 위한 책략을 세울 것을 요청하며 쿠데타를 모의하였고, 그의 측근들은 이에 적극적으로 동조하였다. 같은 해 10월에는 우보(右輔) 고복장(高福章)이 태조왕에게 수성의 불온한 행위를 고발하며 숙청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태조왕은 고복장의 진언을 물리치고 12월에 수성에게 왕위를 양위한다.
수성이 태조왕의 양위를 받아 차대왕으로 왕위를 계승한 다음해(147)에 미유는 좌보(左補)가 되었다. 당시 미유는 관나부 패자(沛者)로 기록되고 있어, 우태였던 132년과 147년 사이에 패자로 관등이 올랐음을 알 수가 있다. 패자는 나부의 최고위급 인사에게 수여하던 관등이었으므로 그가 관나부의 최고 실력자였음을 알 수가 있다.
또한, 그가 임명된 좌보는 우보와 함께 고구려 최고의 관직이었다. 그중에서 좌보는 서열상 우보에 앞섰으므로 미유는 사실상 국왕을 제외한 고구려 최고위직에 오른 것이다. 이것은 미유와 관나부 세력이 차대왕의 최측근으로서 그의 즉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다만, 기록에는 차대왕 2년(147) 7월 좌보 목도루(穆度婁)가 은퇴하고 어지류(菸支留)가 좌보로 임명되는 것으로 나오고 있어, 미유는 우보로 임명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