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한(柳明韓)이 편집인 겸 발행인으로 창간, 건실하게 민중 속으로 파고든 월간지이다.
주간은 초대 임학수(林學洙)에 이어, 김창집(金昌集)·박영준(朴榮濬)이었다. 광복 직후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좌우익에 기울지 않으면서, 또한 무비판적이지도 않아서 지식층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
B5판에 100면 정도의 잡지였으나, 인쇄에서도 좋은 효과를 노렸고, 어려운 재정사정을 무릅쓰고 꾸준히 발행하여 품위를 잃지 않았다.
문화인의 종합잡지답게 편집국장이 바뀌어도 때로는 김구(金九)의 연두감언(年頭感言, 1949년 1월호)과 신석우(申錫雨)의 연두사를 싣는가 하면, 당시의 유명한 신문인 이정순(李貞淳)의 「선거와 신정부의(구상)」(1948.4.1 발행), 특집 「중국은 어데로」 등 정치문제와 아울러 외지에 실린 「피카소의 모습」을 전재하기도 하고, 연극문제·영화문제·음악시평 등과 작게는 부엌사정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다루었다.
1949년 3월호에는 특집 「남북통일」에서 안재홍(安在鴻)·조소앙(趙素昻)·함상훈(咸尙勳)·현상윤(玄相允)·엄항섭(嚴恒燮) 등의 묵직한 글이 실리기도 하였다.
그해 6월호에는 외무부장관 임병직(林炳稷)의 「대일배상과 우리의 주장」과 당시 국회부의장 김약수(金若水)의 「국회의 업적과 반성」이 나란히 실렸다.
이와 같이, 이승만 직계의 임병직과 국회프락치사건의 김약수의 글이 나란히 실릴 수 있었던 것으로 보아서도 편집태도가 시류(時流)보다 전체국민을 의식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1950년 5월 1일 통권 제45호로 종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