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내원 ()

천도교
인물
해방 이후 천도교의 종법사 등을 역임한 지도자. 사회운동가.
이칭
우춘(又春), 범암(梵菴)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902년(고종 39)
사망 연도
1982년
본관
밀양(密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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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해방 이후 천도교의 종법사 등을 역임한 지도자. 사회운동가.
개설

본관은 밀양(密陽). 호적명은 박내원(朴來元). 아호는 우춘(又春), 도호(道號)는 범암(梵菴). 동학의 대접주(大接主)이었던 박광호(朴光浩)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김씨(金氏)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어려서 한학을 공부하였고, 3·1운동 후 서울에서 YMCA 영어과에서 2년간 수학하였고, 18세에 천도교청년회 중앙위원으로 피선되면서 천도교전위단체에 헌신하기 시작하였다. 1921년부터 서울 대동인쇄 문선공으로 일하면서 인쇄공노조를 결성, 노동조건개선을 위한 파업을 주도하면서 진보적 사회운동에 참여하였다.

1924년 조선노동총동맹이 결성되자 노동부 상무위원으로 활동하다가, 1926년 천도교장로인 권동진(權東鎭)의 지도로 천도교청년대표로 추천되어 6·10만세운동을 추진하였고, 권오설(權五卨)·민창식(閔昌植) 등과 더불어 조직과 연락하고 유인물을 인쇄하는 등 주요한 임무를 맡아 진행하다가 붙잡혀 서대문형무소에서 5년 동안 옥고를 치렀다.

1930년부터는 주로 천도교 활동에 전념하면서 천도교청년동맹 위원장·천도교청우당 조직부장·천도교중앙총부 감사위원 등을 지냈고, 태평양전쟁 말기에는 가평에 은거하여 일제의 탄압을 피하였다.

광복 후 천도교활동에 헌신하여 천도교보국당 조직부장, 만화회 총무부장을 지냈으며, 6·25전쟁 후 천도교보국연맹(天道敎保國聯盟) 조직부장과 종의원(宗議院) 의원으로 활동하였다.

1960년 4·19 후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 결성에 참여, 부의장직을 맡아 통일운동에 앞장섰으며, 1961년 5·16군사정변이 일어나자 검거되어 2년 6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1966년 다시 천도교활동에만 주력하게 되었는데 상주선도사 겸 서울교구장을 지냈고, 1967년 천도교유지재단 상무이사로 있으면서 수운회관을 건설하였다. 1971년 천도교 최고 영예인 종법사가 되어 교단을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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