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세화 ()

근대사
인물
대한제국기 을사조약 체결 후 충청북도에서 활동한 의병.
이칭
연길(年吉)
아호
의당(毅堂)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34년(순조 34)
사망 연도
1910년(순종 3)
본관
밀양(密陽)
출생지
함경남도 고원
주요 경력
의병장
대표 상훈
건국훈장 독립장(1962)
내용 요약

조선 말기에서 대한제국기 충청북도 지방에서 활동한 의병장이다. 을미사변과 단발령에 반대하여 의병을 계획하다가 체포되었다. 1905년 을사조약 체결에 반대하여 남현에서 의병을 일으켰다가 다시 체포되었고, 일제의 대한제국 강제병합이 임박하자 단식하여 23일 만에 사망하였다.

정의
대한제국기 을사조약 체결 후 충청북도에서 활동한 의병.
가계 및 인적 사항

박세화(朴世和)는 1834년의 함경남도 고원(高原)의 남흥(南興)에서 박기숙(朴紀淑)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밀양(密陽)이다. 모친은 단양우씨(丹陽禹氏)이다. 자는 연길(年吉), 아호는 의당(毅堂)이다. 8대조가 송시열(宋時烈)의 문하에 출입하였던 박경상(朴景祥)이고, 조부 박상욱(朴尙郁)은 첨사를 지낸 관료이다.

주요 활동

박세화는 당시 주1, 간재학파(艮齋學派) 등의 학파와 비견될 만한 의당학파(毅堂學派)를 창시하였다. 1893년 조정에 추천되었으나 사양하였고, 1895년 영릉참봉(英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얼마 후에 을미사변(乙未事變)단발령(斷髮令)이 내려지자 박세화는 문생인 회당 윤응선(晦堂 尹應善)과 함께 문경(聞慶)의 산중으로 들어가 거병 계획을 세웠다.

한편, 제천 의진이 일어나자 1896년 2월 윤응선을 보내어 돕게 하였다. 그러나 문경에서의 거사 계획이 적에게 노출되었고 박세화도 노환으로 성사시키지 못한 채 문경 병참소(兵站所)에 체포되었다. 1905년에는 을사조약 체결에 반대하여 윤응선과 함께 남현(南峴)에서 의병을 일으켰다가 청풍에서 다시 체포되었다. 1910년 8월 주2을 당하게 되자 탄식하면서 식음을 전폐하여 23일 만에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단행본

정성원·권오영·김경수·박인호·박민영·강대덕·구완회·최장근, 『제천의병의 이념적 기반과 전개』(이회문화사, 2002)

논문

권오영, 「朴世和의 사상과 현실인식」(병산영당, 2016)
김종수, 「의당(毅堂) 박세화(朴世和)의 『자경록(自警錄)』연구」(『인문과학』 57, 성균관대학교 인문학연구원, 2015)
구완희, 「의당(毅堂) 박세화(朴世和)의 강학 활동」(『朝鮮史硏究』 23, 朝鮮史硏究會, 2014)
정경훈, 「毅堂 朴世和의 文集과 文學 一考」(『民族文化』 44, 한국고전번역원, 2014)
주석
주1

19세기 전반에 형성되어 20세기 초반까지 한국 근대사의 전개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대표적인 위정척사 세력을 말한다.

주2

대한제국 융희 4년(1910)에 일제가 강제적으로 우리나라의 통치권을 빼앗고 식민지로 삼은 일. 우리나라는 1945년 8월 15일에 독립을 되찾았다.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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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김헌주(연세대 HK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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