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고령(高靈). 자는 치문(穉文), 호는 금파(錦坡). 아버지는 박수룡(朴秀龍)이다. 영주(榮州)에서 살았다.
최익현(崔益鉉)의 대원군 집정을 반대하는 소(疏)에 연루되어 혹독한 화를 당하였다. 다섯 차례 형퇴(刑堆)를 받았고 귀양을 갔으나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용모가 옥처럼 깨끗하고 은실같은 수염이 가슴까지 드리워졌으며 헌칠한 풍채가 남의 마음을 끌었다. 취학하자 독려하지 않아도 글 읽기를 좋아하고 이해력이 빨라 대의를 곧 파악하고 또 서예에도 능하였다.
1869년(고종 6) 알성문과에 급제하여 이듬 해 승정원부정자가 되었고, 1871년 사헌부감찰이 되었다. 이듬 해 통훈대부에 올라 전적(典籍)이 되었고, 이어서 좌정언(左正言)이 되었다. 1873년 최익현이 상소로서 대원군의 집정을 비판하여 대원군이 교외에 물러나고 최익현이 호조참판에 오르자, 이를 논박하는 상소를 했다가 흑산도에 유배되었다.
만년에는 세상과 뜻이 맞지 않아 일체의 세상일과 인연을 끊고 독서에 마음을 쏟았다. 나이 70세가 되자 조정에서 수직(壽職)의 은전(恩典)이 있을 것을 알고 자제에게 명단을 올리지 못하게 엄금하였다. 저서로는 『금파유집(錦坡遺集)』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