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광주(光州). 자는 공문(公文), 호는 송애(松厓). 증조는 반사덕(潘思德)이고, 할아버지는 반강(潘崗)이며, 아버지는 반서린(潘瑞麟)이다.
어떤 재상의 종이었으나 재상이 반석평의 재주와 성품을 사랑해 글을 가르치고 아들없는 부자집에 양자로 보내 공부에 힘쓰게 하였다. 조광조(趙光祖)·김식(金湜) 등과 교유하였다. 1507년(중종 2)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이어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이 되고 경차관(敬差官)으로 함경도에 파견되어 여진의 동정을 보고했으나 천얼 출신이라 하여 사간원의 탄핵을 받았다. 1516년 안당(安塘)의 추천으로 종5품으로서 경흥부사가 되고, 1522년 만포진첨절제사(滿浦鎭僉節制使)를 거쳐 함경남도병마절도사가 되었다.
그러나 1524년 군기를 살피지 않고 도로 사정을 잘못 보고했다는 이유로 탄핵받아 파직되었다가 다시 병조참의에 임명되었다. 1527년에 함경북도병마절도사, 1530년에 경연특진관(經筵特進官)과 충청도관찰사를 거쳤다. 1531년에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예조참판과 전라도·경상도 관찰사를 지냈다.
1533년 다시 함경북도병마절도사로 임명되었으나 이미 한번 역임한 바 있고 또 문신이기 때문에 불가하다는 반대가 있어 부임하지 못하였다. 그 후 평안도관찰사를 거쳐 공조판서가 되었다. 그러나 시종(侍從)을 역임하지 않았다 하여 공조참판으로 고쳐 임명되었다.
동지중추부사·형조참판·한성부판윤·형조판서 등을 지내고 이듬해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가 되었다. 뒤에 주인집 자손이 잔미(殘微)해 졌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혹 노상에서 만나면 반드시 예의를 차렸다 하며 청렴하고 겸공한 관리로 이름났다. 시호는 장절(壯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