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역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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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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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적이 임금을 배반하고 반란을 일으킨 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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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반역향(叛逆鄕)은 역적이 임금을 배반하고 반란을 일으킨 고장이다. 반역을 꾀한 죄인은 수범(首犯)·종범(從犯)을 가리지 않고 모두 극형에 처하고, 태어난 고을은 읍호를 강등하고 수령을 파직하였다. 그러나 조선 말기에 이르면 죄인이 거주하고 있는 고을을 강등하고, 수령은 파직하지 않았으며, 능침이 있는 고을은 강등하지 않았다. 반역향을 차별하는 처벌을 한 것은 반역자에 대한 치죄와 혈족에 대한 연좌를 넘어 그 지방민에 대해서도 연대 책임을 지운 것이며, 나아가 수령에 대한 징계를 통해 중앙집권적인 통제력을 강화하고자 한 것이다.

목차
정의
역적이 임금을 배반하고 반란을 일으킨 고장.
내용

반역자를 극형(極刑)으로 처벌하는 형률(刑律)은 중국의 『주례(周禮)』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당률에서는 사직을 위태롭게 해서 망하게 하기 위해 음모하는 모반(謀反), 종묘 · 산릉(山陵) · 궁궐을 파괴하려고 한 음모를 말하는 대역(大逆), 본국을 배반하고 타국과 몰래 통하려고 한 음모를 말하는 모반(謀叛) 등으로 구분하기도 하였는데, 이에 대한 엄격한 구분이 없이 일반적으로 반역이라 통칭하였다.

삼국 · 고려시대에는 『주례』를 바탕으로 한 당률(唐律)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삼국시대부터 반역자는 극형에 처해 목을 베어 죽이고, 그 가족은 노비로 삼고, 가산은 모두 몰수하였다. 고려에서는 당률에 준해 모반대역자는 모두 참형(斬刑)에 처하고 아버지와 16세 이상의 아들은 교형(絞刑)에 처하였다. 그리고 15세 이하인 자와 모녀 · 처첩(妻妾) · 조손(祖孫) · 형제 · 자매 또는 아들의 처첩은 공신의 집에 노비로 삼고 재산은 모두 관(官)에서 몰수하였다. 이처럼 가족에게 미치는 형벌 외에 그 고을을 ‘반역향’이라 하여 읍호(邑號)를 강등하기도 하였다. 고대 국가의 발전 과정에서 반역향은 총체적으로 천민화하는 경우가 있었으며, 고려시대에는 1204년(신종 7)의 경주와 1221년(고려 고종 8)의 가산(嘉山)의 경우에서 찾아볼 수 있다.

조선시대의 형률은 『대명률(大明律)』에 의거하였는데, 여기에는 『당률소의(唐律疏義)』에서 유래한 열 가지의 큰 죄[십악(十惡)]가 포함되어 있으며, 그 가운데 모반(謀反) · 모대역( 謀大逆) · 모반(謀叛)이 수위에 열거되어 있다. 그리고 우리의 실정에 맞게 해석한 『대명률직해(大明律直解)』에 의하면, 모반(謀反)은 사직을 위해하려고 꾀하는 일, 모대역은 종묘와 산릉 및 궁궐을 훼손하려고 꾀하는 일, 모반(謀叛)은 본국을 배반하고 슬그머니 다른 나라로 따라가기를 꾀하는 일이라고 해석하였다. 십악(十惡)을 범(犯)하면 수범(首犯) · 종범(從犯)을 가리지 않고 모두 극형에 처하였다.

따라서 반역죄는 주범이나 추종자를 구분하지 아니하고 모두 참형에 처하며, 처첩 · 자녀는 공신의 집에 주어 노비로 삼게 하고, 재산은 모두 관에서 몰수하였다. 그리고 부모 · 조손 · 형제는 호적이 같거나 같지 않거나 관계없이 모두 유이천리안치(流二千里安置)의 형에 처하였다. 그 외의 연좌율은 모반대역죄에 준하도록 했으며 역적의 태생읍(胎生邑)에 대해서는 읍호를 강등하고 수령을 파직하였다.

영조 때 간행된 『속대전』에 의하면 반역자는 그 집을 파서 웅덩이로 만들고[파가저택(破家瀦澤)], 읍호를 강등하고 해당 고을의 수령은 파직하였다. 이때의 읍은 죄인이 사는 고을을 말한다. 읍호 강등의 내용은 현령 이상은 현감으로 강등시켰고, 현감 고을은 혁파하지는 않고 차서(次序)를 모든 현의 끝에 두었다. 그리고 이렇게 강등된 읍호는 10년이 지나면 복구하도록 하였다. 『속대전』 반포 후에도 태생읍을 강등한 사례가 보이나, 정조 때 『대전통편』 간행 이후에는 거주읍을 강등하였다. 또한 『대전회통』에서는 수령은 파직하지 않았으며 능침이 있는 읍은 강등하지 않았다.

실제로 반역향으로 읍이 강등된 사례는 태종 3년(1403) 조사의(趙思義)의 난으로 인한 영흥의 강등과 세조 때 이시애(李施愛)의 난으로 길주가 강등된 사례가 대표적이다. 이외에도 읍호가 강등된 사례로 세종 때의 남해, 광해군 때의 충주, 선조 때의 안악, 숙종 때의 가평, 영조 때의 서산 · 청주, 정조 때의 안동 · 공주 등 그 사례를 많이 찾아볼 수 있다. 특히 충주는 광해군 · 영조 · 순조 연간에 걸쳐 6차례나 강등되는 사례를 남기고 있다.

반역향으로 낙인이 찍히면 그 지역 출신자들은 관직 진출 등에서 차별 대우를 받았다. 1467년(세조 13) 이시애의 난으로 인하여 함경도가 반역향으로 낙인이 찍혔고, 1589년(선조 22)의 기축옥사(己丑獄事)[정여립(鄭汝立) 모반사건]로 전라도가 반역향으로 지목되었으며, 1728년(영조 4)의 무신란(戊申亂)[이인좌(李麟佐)의 난]으로 경상도가 영조~정조시대 내내 반역향으로 낙인이 찍히기도 하였다.

반역향이라 하여 차별을 둔 것은 반역자에 대한 치죄와 혈족에 대한 연좌를 넘어서 그 지방민에 대해서도 연대 책임을 지운 것이다. 나아가 수령에 대한 징계를 통해서 중앙집권적인 통제력을 강화하고자 한 것으로 이해된다.

참고문헌

원전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세조실록(世祖實錄)』
『영조실록(英祖實錄)』
『정조실록(正祖實錄)』
『대명률직해(大明律直解)』
『속대전(續大典)』
『주례(周禮)』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대전회통(大典會通)』

단행본

논문

김백철, 「18세기 영남 '반역향' 담론의 실상과 허상」 (『영남학』 76호,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2021)
임승표, 『조선시대 상벌적 읍호승강제 연구』(홍익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1)

인터넷 자료

기타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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