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부흥운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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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사
사건
926년 발해 멸망 후, 그 유민들이 발해를 계승해 국가를 세운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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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926년 발해 멸망 후, 그 유민들이 발해를 계승해 국가를 세운 운동.
내용
  1. 부흥운동 전기

발해 멸망 후에 세워진 최초의 왕조는 동단국(東丹國: 동란국으로 발음하기도 함)이다. 그러나 동단국은 거란 정복자들에 의해 세워진 괴뢰정권이었다. 동단국은 발해 유민들의 저항과 내부문제로 인해 927년 서쪽의 요양으로 옮겨갔다.

발해유민들의 실질적인 부흥왕조인 ‘발해’가 건국되어, ‘후발해(後渤海)’라고 불리어지게 되었다. 후발해의 건국 연대는 고정사(高正詞)가 발해사신으로 후당에 갔던 929년경으로 보고 있으며, 멸망 시기는 후발해의 올야(兀惹)정권이 거란으로부터 공격을 받고 붕괴되었을 것으로 보이는 1003년 정도로 본다.

후발해의 수도는 옛 발해 수도가 있던 홀한성(忽汗城)이었다고 보며, 그 시조는 발해국의 대씨(大氏)였을 것으로 짐작한다. 그러나 후발해의 대씨 정권은 곧 그들의 실질적 권력을 올야 출신의 오씨(烏氏)에게 빼앗기어 ‘오씨발해’가 되었다.

후발해의 발전은 군사·외교적인 면에서 두드러졌다. 975년에는 거란에게 반기를 들고 도망 온 발해유민 출신의 장수 연파(燕頗)와 함께 발해의 옛 부여부를 탈환하기 위한 군사작전을 펴기도 하였다. 또한 발해의 옛 장령부 지역이었던 휘파허(輝發河 또는 回跋河) 유역에서의 싸움에서도 원군 7천명을 보내기도 했다.

979년경에는 정안국(定安國)의 일부 세력을 규합하기도 하였다. 외교적인 면에서는 후당에 고정사·성문각(成文角) 등을 7차례나 보냈는가 하면, 마지막으로는 954년 7월 발해 호족 최오사(崔烏斯) 등 30인이 후주(後周)에 투화했던 기록이 남아 있다.

한편 발해의 서경압록부였던 압록강 일대를 중심으로 한 발해유민들의 부흥운동은 열씨(烈氏) 정안국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었다. 건국연도에 대해서는 935∼936년설과 937년설,970년설 등이 있다.

『송사(宋史)』 열전에 의하면, 970년 국왕 열만화(烈萬華)가 송나라에 사신을 파견했다고도 전한다. 그렇다면, 979년(경종 4)에 고려에 내투해 오는 수만 명의 발해 사람들이란 대체로 정안국 사람들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1. 부흥운동 후기

발해의 또 다른 부흥 운동은 1029년대연림(大延琳)에 의해 세워진 흥요국(興遼國)에 의해 결실을 보았다.

동경요양부(東京遼陽府)의 대장군인 동경사리군상온(東京舍利軍詳穩)으로 활약하던 친거란파의 발해유민이었던 대연림은 동경요양부의 호부사(戶部使) 한소훈(韓紹勳)과 호부 부사(副使) 왕가(王嘉) 등의 실정으로 민심이 동요하자, 이 틈을 타서 ‘흥요국(興遼國)’ 왕에 즉위, ‘천경(天慶 혹은 天興)’으로 원년을 삼았다.

그러나 대연림과 같이 계획을 세웠던 왕도평이 도주하고 보주(保州: 현재 평안북도 의주)의 발해출신 태보(太保) 하행미(夏行美)까지 배신하자, 고려에 5차례나 사신을 파견해 도움을 요청했으나 모두 실패하였다.

결국 흥요국은 1030년 그의 부하였던 양상세(楊祥世)의 배신으로 대연림이 사로잡혀 거사한 지 1년 만에 멸망했고, 많은 발해유민들이 고려로 망명하였다.

또 다른 부흥운동은 1116년에 발해의 지배층유민인 고영창(高永昌)이 ‘대발해국(大渤海國, 일명 大元)’을 세움으로써 실현되었다.

고영창은 당시 동경 유수 소보선(蕭保先)에 대해 반감을 가진 발해 유민들을 선동해 1116년 정월 그의 거사에 호응한 발해병사 8천명으로써 동경 용양부를 점령하고 스스로가 ‘대발해국’ 황제에 즉위해 ‘융기(隆基, 혹은 應順)’로 원년을 삼았다.

고영창은 한때 신흥 금나라와 협상도 갖는 등 유리한 입장에 있었다. 그러나 황제를 고집하는 등 경직된 협상을 벌이다 오히려 금나라 군대에 의해 참살되어 5개월 만에 실패하고 말았다.

1115년에 일어났던 고욕(古欲)의 부흥 운동도 있었다. 고욕은 자칭 ‘대왕(大王)’이라고만 했다고 전하고, 이들이 어떠한 국호나 연호를 썼는지는 모른다. 단지 고욕의 부흥정권은 거란의 심장부인 시라무렌허(西刺木倫河) 상류의 요주(饒州)에서 발해유민의 제철 기술자 1천호를 포함한 호구 4천의 장락현(長樂縣)과 태종 때에 발해의 잡호로써 세운 안민현(安民縣)의 발해유민을 배경으로 세워졌었다는 정도가 알려졌을 뿐이다.

고욕 역시 그가 대왕을 칭한 지 5개월 만에 거란의 계략에 말려들어 사로잡히면서 실패하였다.

  1. 발해의 고구려 계승의식

발해는 일본과의 외교관계에서 그 스스로를 ‘발해국’ 내지는 ‘고려국(高麗國)’으로 자칭하므로써 고구려의 계승의식을 분명히 하였다. 종족적으로도 발해는 예맥·부여계통의 고구려인들이 지배층을 구성하고 있는 특징을 보이고 있다.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했을 것으로 생각되는 가장 확실한 부분은 고고학적인 부분이다. 발해 지배층의 묘제는 석실묘로써 이는 고구려의 것을 그대로 계승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집터에서 발견된 온돌유적도 고구려적인 성격의 것으로 파악된다. 물론 전체적으로 온돌을 사용했는지까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왕실의 침전터 등에서는 온돌을 사용하고 있었다.

문화적으로 볼 때도 발해와 고구려의 연관성은 짐작된다. 『구당서(舊唐書)』에서는 발해가 고구려와 풍속이 같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아울러 발해어의 잔재가 가장 많다고 할 수 있는 만주어(滿洲語)가 흑수계의 숙신어(肅愼語) 보다 예맥계의 부여·고구려어에 더 많았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 만주어가 ‘부여한어계(夫餘韓語系)’의 후손인 한국어와도 친연관계에 있다는 주장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한편, 발해에 대한 후대의 계승의식을 보면, 발해 유민들이 세운 부흥운동 국가들이 ‘후발해’, ‘대발해’ 등의 명칭을 사용한다거나 고구려에서 발해로 이어지는 영역상의 공통점을 언급하는 것으로 볼 때 일정한 계승의식을 가졌다고 볼 수 있다.

고려시대에도 역시 발해 세자 대광현을 받아들일 때 그에게 성명을 내리고 고려의 종적(宗敵)을 붙인 사실 등에서 발해에 대한 고려의 인식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고구려의 계승의식에 가려져 강하게 내비쳐지지는 않았고 후기로 오면서 점차 약화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참고문헌

『송사(宋史)』
『책부원구(冊府元龜)』
『요사(遼史)』
『금사(金史)』
『거란국지(契丹國志)』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발해 부흥국가와 고려의 발해 계승의식」(이효형, 『역사와 경계』60, 2006)
「발해의 고구려 역사 계승 문제」(한규철, 『한국고대사연구(韓國古代史硏究)』33, 2004)
「발해국의 고구려계승성」(한규철, 『선사와 고대』9, 1997)
「발해유민의 부흥운동」(한규철, 『한국사』10, 국사편찬위원회, 1996)
「발해부흥국(渤海復興國) ‘후발해(後渤海)’연구(硏究)」(한규철, 『국사관논총(國史館論叢)』62, 1995)
「고려(高麗)와 발해(渤海)」(이용범, 『한국사(韓國史)』4, 국사편찬위원회, 1974)
「後渤海の建國」(日野開三郞, 『帝國學士院紀事』2·3, 1943)
「定安國に就いて」(和田淸, 『東洋學報』6, 1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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