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분성(盆城). 자는 재지(載之), 호는 계당(桂堂). 아버지는 배진(裵縉)이다.
1462년(세조 8)에 15세로 생원과와 진사과에 모두 장원하였으며, 그해 별시 문과에 정과로 급제하여 예문관에 들어갔다. 1464년 대책(對策)에서 3등으로 뽑혔으며, 1469년(예종 1)에 좌랑(佐郞)에서 이조정랑(吏曹正郞)이 되었다.
1470년(성종 1) 재행(才行)을 겸비한 자를 뽑아 예문관에 겸관(兼官)시킬 때 발탁되었으며, 이듬해 경상도경차관(慶尙道敬差官)에 임명되었다. 1472년 원상(院相) 혁파를 주장한 박시형(朴時衡)을 피혐시킨 일로 대간의 탄핵을 받았으나 왕명으로 죄를 면하였으며, 1474년에 낭청(郞廳)으로서 국장(國葬)에 힘쓴 공으로 녹피(鹿皮) 한장을 하사받았다.
1475년 4월 일본 사신을 맞이하는 선위사(宣慰使)에 임명되었고, 7월에는 의정부 사인(議政府舍人)으로 일본에 파견될 통신사(通信使)에 낙점되었다. 같은 해 11월에도 일본 사신에 대한 선위사로 파견됐는데, 이때 자주철릭(紫紬帖裏)과 사슴가죽 신발을 하사받았다. 1479년 호조참의(戶曹參議)가 되었다. 직도(直道)로써 조정에 봉사하였고, 불교를 배척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