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에 ‘ 삼정(三政)의 문란’으로 불리는 부세 제도의 폐단 가운데 한 사례이다. 전정(田政) · 군정(軍政) · 환정(還政) 중에서도 전정의 문란에 속한다. ‘백지(白地)’는 수확이 없는 빈 땅[공지(空地)]을 말하기도 하고, 납세자와 아무 관계가 없는 땅을 말하기도 한다. 즉 백지징세는 납세의 대상이 아닌 땅을 징세안(徵稅案)에 올려놓고 강제로 징수하는 것을 뜻한다.
예를 들어, ‘수목(樹木)이 숲을 이루고 모래와 돌[사석(沙石)]이 쌓인 곳’에서 세금을 징수하는 경우, 재해를 입었거나 오래 묵은 진황지(陳荒地)에서 세금을 징수하는 경우, 자기 몫의 세금 내기도 어려운데 남의 몫까지 떠안게 되는 경우 등이 해당된다.
백지징세의 문제가 발생하게 되는 일차적인 원인은 양전(量田)의 부실이었다. 조선에서 양전은 20년마다 시행하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숙종 때 삼남(三南) 지역에서 양전을 실시한 뒤 전국적인 규모의 양전은 시행되지 못하고 일부 지역 단위로만 시행되었다.
오랜 기간 양전이 실시되지 못하면서 실제 전품(田品) · 지형(地形) · 지목(地目) 등의 변화를 양안(量案)에 반영하지 못하였다. 현실의 변화를 반영하지 못한 양안에 기반하여 전세가 부과되었으므로, 백지징세의 사례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백지징세의 또 다른 발생 요인은 비총제(比摠制) 아래 부세 수취 과정에서도 찾을 수 있다. 비총제는 각 군현별로 일정량의 전세를 부담하는 제도인데, 해마다 호조에서 당해의 풍흉을 예년과 비교하여 재결(災結) 수와 실결(實結) 수를 정하고 수세 총액을 결정하였다.
호조에서 정해주는 수세 총액은 실제 작황에 맞지 않는 경우도 많았지만, 지방에서는 그 수를 맞추어야 하였으므로 억지로 백지징세를 하는 폐단도 발생하였다. 향촌사회에서 직접 수세 업무를 담당하였던 이서층의 농간도 백지징세의 폐단을 심화시켰다. 조선 후기 대동법과 균역법의 시행으로 각종 부세가 전세화(田稅化)되던 추세 속에서 이러한 백지징세의 폐단은 전정의 문란을 심화시키는 요인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