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하음(河陰). 자는 군보(君輔), 호는 서관(墅觀). 용감하고 특히 활을 잘 쏘아 명궁으로 알려졌으며, 격구(擊毬)는 당대 제일인자였다.
1453년(단종 1) 수양대군이 김종서(金宗瑞) 등을 타도하기 위해 일으킨 계유정난 때 공을 세워 정난공신 2등에 책록되었다. 이후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가 되면서 강성군(江城君)으로 책봉되었다. 1456년(세조 2)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가 되고 이듬해 도진무(都鎭撫)가 되었다.
그러나 원래 사람됨이 탐욕스럽고 혹독해 고리대금으로 치부하였다. 1460년 전라도처치사(全羅道處置使)에 임명되었으나, 이듬해 선군(船軍) 30인에게 황원곶목장(黃原串牧場)의 묵은 땅을 경작하게 하고 면화 74석(石) 6두(斗)를 거두어 횡령한 것이 문제가 되어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1462년 강무(講武: 군대의 사열) 때에는 사대장(射隊將)이 되었다. 또, 전라수사로 있을 때에는 군졸들을 이끌고 여러 섬에 참깨와 목화 등을 심게 하고 그 수확을 착복, 봉석주의 창고는 국고나 다름없이 많은 곡식과 재물로 가득찼다고 한다.
1464년 간통죄로 의금부에 투옥된 여인의 재물과 미모를 탐하여 첩으로 삼으려 했던 일로 사헌부의 탄핵을 받고 고신(告身)을 추탈당했다가 얼마 후 돌려받았다. 이듬해 김처의(金處義)·최윤(崔潤) 등의 역모를 고변했으나, 오히려 그 일에 연루되어 함께 주살되었으며 훈작과 관직도 모두 삭탈당하였다.
1495년(연산군 1) 자손들의 상소로 신원(伸寃: 억울하게 입은 죄를 풀어줌)되고 훈작인 강성군을 회복하였다. 또, 선조 때 훈안(勳案)을 증수할 때 이름이 오르게 되었다. 1794년(정조 18) 자손들이 또 소를 올려서 시호를 청하고 허락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