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주 부석사 소조 여래 좌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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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정보
영주 부석사 소조여래좌상
영주 부석사 소조여래좌상
조각
유물
국가유산
경상북도 영주시 부석면 부석사에 있는 고려시대의 불상.
국가문화유산
지정 명칭
영주 부석사 소조여래좌상(榮州 浮石寺 塑造如來坐像)
분류
유물/불교조각/소조/불상
지정기관
국가유산청
종목
국보(1962년 12월 20일 지정)
소재지
경북 영주시 부석면 북지리 149 부석사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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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경상북도 영주시 부석면 부석사에 있는 고려시대의 불상.
개설

1962년 국보로 지정되었다. 불상 높이 2.78m, 광배 높이 3.8m. 무량수전 안에서 동남쪽을 향하여 결가부좌의 자세로 앉아 있는 이 불상은 오른손을 무릎 위에 놓은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의 수인(手印)을 취하고 있다.

내용

나발(螺髮)의 머리에 육계(肉髻)가 큼직하다. 얼굴은 풍만하며, 길게 올라간 눈초리, 날카로운 콧날, 두터운 입술 등의 상호(相好)에서는 근엄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건장한 신체의 결가부좌한 자세는 안정감과 엄숙한 느낌을 준다. 왼쪽 어깨와 팔을 덮은 우견편단(右肩偏袒)의 법의(法衣)는 가슴과 배를 지나며 촘촘한 평행의 옷주름을 형성하고 있다. 이러한 모양의 옷주름은 양쪽 다리에도 표현되어 있다.

당당하면서도 장중한 신체, 안정감 있는 자세, 우견편단의 착의법, 옷주름의 표현 등은 석굴암본존불을 모본(模本)으로 삼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하남 하사창동 철조석가여래좌상(보물, 1963년 지정)을 비롯한 고려 초기 일련의 불상들과 같은 계통의 양식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온화함이 사라진 근엄한 표정이나 형식화로 흐른 옷주름 등은 초기 양식에서 점차 후기 양식으로 변모되어 가는 모습으로 생각된다.

이 불상은 석가모니불에 특징적인 항마촉지인을 취하고 있다. 구전에서는 두 손이 파손되는 등 손상을 입어 조선시대에 보수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원래 모습이 항마촉지인이었는지는 불확실하다. 그러나 불상이 봉안된 전각의 명칭이 무량수전이고, 부석사 경내에 있는 원융국사비(圓融國師碑, 1054년)의 비문에 보처(補處: 주불의 좌우에 모신 보살)가 없는 아미타불을 조성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불상의 명칭은 아미타불로 추정된다.

불상 뒤에는 당초문(唐草文)과 불꽃무늬가 조각된 목조광배가 따로 조성되어 있는데, 원형의 두광(頭光)과 신광(身光) 안에 각기 3구와 4구씩의 화불(化佛)을 부착시켰던 흔적이 남아 있다. 광배 안에 새겨진 치밀한 당초문이나 광배 밖으로 활활 타오르는 듯한 불꽃무늬는 불상의 위엄을 강조하는 동시에 정교한 고려시대 불교 미술의 한 단면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의의와 평가],

이 불상은 통일신라시대 불상 양식의 전통을 이어 제작된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불상으로서의 위엄이 잘 배어 있으며 정교한 제작 기법을 보이는 우수한 예에 속한다. 또한 소조상(塑造像: 진흙으로 만든 불상)으로서는 가장 크고 오래된 것이어서 중요한 평가를 받고 있다.

참고문헌

『국보』2 금동불·마애불(황수영 편, 예경산업사, 1985)
『한국미술사전』(대한민국예술원, 1985)
『문화재대관』(문화재관리국, 1969)
집필자
박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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