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군은 조선 세종 때 서북 방면의 여진족을 막기 위해 압록강 상류에 설치한 국방상의 요충지이다. 국토 경영에 적극적이었던 세종은 병사를 동원하여 여진족을 정벌하고, 여연·자성·무창·우예의 4군을 설치하였다. 그러나 북방 개척 사업을 유지하기 어려워 1455년에 여연·무창·우예의 3군을 폐지하고 강계부와 구성부로 주민을 옮겼다. 1459년에 자성군이 폐지되면서 ‘폐사군(廢四郡)’이라 불렀다. 영토를 포기한 것이 아니라 국경방어선의 임시적인 후퇴였기 때문에 18세기 후반에 이르러 군사 방어의 거점으로 재개발되었다. 19세기 후반에 진보(鎭堡)가 다시 설치되었다.
여연(閭延) · 자성(慈城) · 무창(茂昌) · 우예(虞芮)의 네 군을 말한다.
압록강 방면의 개척은 고려 말에 상당히 진척을 보였다. 그 결과 강 하류인 서북 방면은 거의 다 고려의 영역으로 편입되었으며, 강 상류인 동북 방면으로도 공민왕 때에 강계만호부(江界萬戶府), 1391년(공양왕 3)에 갑주만호부(甲州萬戶府)가 각각 설치되었다.
그러나 강계만호부의 동쪽과 갑주만호부 서쪽의 압록강 상류 남쪽 지역은 여전히 여진족의 활동 무대가 되어 있었다.
조선시대에 이 지역의 개척은 크게 진척되어 1401년(태종 3)에 강계만호부를 강계부(江界府)로 승격시켰다. 갑주는 1393년(태조 2)에 동북면안무사(東北面安撫使) 이지란(李之蘭)의 축성(築城) 이후 1413년에 갑산군(甲山郡)으로 개칭되었다.
1416년에는 갑산 관하의 일부를 분리해 현 중강진(中江鎭) 부근에 여연군을 설치하였다. 다음 해에는 이를 함길도(咸吉道)로부터 평안도에 이관(移管)하는 동시에 거리가 가까운 강계도호부에 소속시켰다. 이로써 갑산 서쪽의 압록강 남안(南岸)이 모두 조선의 영역으로 되었다.
그러나 세종 때에 이르러 여진족의 침입이 빈번해지는 가운데 1432년(세종 14) 건주위(建州衛) 추장 이만주(李滿住)의 침입이 있었다. 조선에서는 이를 계기로 1433년 최윤덕(崔潤德)을 평안도도절제사(平安道都節制使)로, 김효성(金孝誠)을 도진무(都鎭撫)로 임명해 황해 · 평안도의 병사 1만5000여명으로써 이를 정벌하였던 것이다.
이 때의 경험으로 “이 지방은 여연 · 강계와도 거리가 멀고 교통이 불편해 위급할 때는 대비하기 어렵다.”고 하여 그 해에 양쪽지역의 중간에 위치한 자작리(慈作里 : 지금의 慈城)에 성(城)을 쌓아 이에 자성군이라 하였다. 그리고 이에 여연의 남촌(南村), 강계 북촌의 민호(民戶)를 떼어붙이고 강계부에 소속시켰다.
자성군의 설치로 여연 · 강계 사이의 연락은 확실해졌다. 그러나 아직도 압록강 연안의 방비는 충분하지가 못했고, 이 방면에 대한 여진족의 침입은 여전히 계속되었다.
그 중에서도 조명간(趙明干 : 지금의 慈城郡 長土面 長城洞)은 위치상 적의 습격을 받기 쉽고 우예보(虞芮堡 : 지금의 土城洞) · 하무로보(下無路堡 : 지금의 湖芮)와도 멀리 떨어져 있어 지키기가 곤란하였다. 그래서 이곳의 군사를 우예 · 하무로보로 철수시키자는 논의가 일어났다.
그러나 국토 경영에 적극적이었던 세종은 1437년 평안도도절제사 이천(李蕆)에게 병사 8,000명으로 재차 여진족을 정벌하게 하였다. 이로써 압록강 너머의 오라산성(兀刺山城 : 지금의 五女山) · 오미부(吾彌部) 등 그들의 근거지를 소탕했으며, 1440년에 여연군 동쪽 압록강 남안에 무창현을 설치하였다가, 1442년에 군으로 승격시켰다.
1443년에는 여연 · 자성의 중간 지점인 우예보에 우예군을 설치해 강계부에 소속시켰다.
이 결과 여연 · 자성 · 무창 · 우예의 사군 설치를 보게 되어 동북의 육진(六鎭)과 더불어 우리 나라 북방 경계는 두만강 · 압록강 상류에까지 미치게 되었다.
한편, 갑산군 소속의 산수보(山水堡)는 적로(賊路)의 요충이었다. 그러나 갑산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1446년에 이곳에 삼수군을 설치, 무창군과 갑산군과의 연락을 확실하게 하였다.
그러나 북계(北界) 개척 사업은 그 유지가 용이하지 않았다. 이에 조정에서는 점차 사군을 철폐하자는 논의가 제기되더니 문종이 즉위하면서부터는 이 문제가 크게 대두하기 시작하였다. 그 뒤 1455년(단종 3)에 이르러 네 군 중 여연 · 무창 · 우예의 세 군을 폐하고 주민을 강계부(江界府)와 구성부(龜城府)로 각각 옮겼다.
1459년(세조 5)에는 자성군마저 폐하고 주민을 강계로 옮기니 사군은 철폐되었다. 그 뒤 이 지방은 오랫동안 ‘폐사군(廢四郡)’이라 불리며 주민의 거주가 금지되었다.
그러나 사군의 철폐는 영토의 포기가 아니라 군사상 국경방어선의 임시적인 후퇴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므로 18세기 후반에 이르러 홍양호(洪良浩)○정약용(丁若鏞) 등은 군사 방어의 거점으로 이 지역을 주목해 재개발을 건의한 바 있다. 그 결과로 19세기 후반에 이 일대에 진보(鎭堡)가 다시 설치될 수 있었다. →육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