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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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기술
인물
조선전기 충청도병마도절제사, 평안도 도절제사 등을 역임한 무신. 과학자.
이칭
불곡(佛谷)
시호
익양(翼襄)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376년(우왕 2)
사망 연도
1451년(문종 1)
본관
예안(禮安 :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
주요 관직
충청도 병마 도절제사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이천은 조선전기 충청도 병마도절제사, 평안도 도절제사 등을 역임한 무신이자 과학자이다. 1376년(우왕 2년)에 태어나 1451년(문종 1)에 사망했다. 1393년(태조 2) 17세의 나이로 별장이 되었고, 1402년(태종 2) 무과에 급제했다. 세종 때는 왜구 척결에 공을 세워 충청도 병마도절제사로 임명되어 병선 제작에 힘썼다. 무예를 닦으면서도 기계장치의 원리를 연구하고 금속공예와 주조법, 제철기술에도 밝아 활자 제작과 화포 개량에 공헌했다. 서운관에서는 장영실 등과 함께 대소 간의, 앙부일구 등의 해시계와 혼천의를 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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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전기 충청도병마도절제사, 평안도 도절제사 등을 역임한 무신. 과학자.
생애 및 활동사항

본관은 예안(禮安). 호는 불곡(佛谷). 군부판서 이송(李竦)의 아들이다. 1393년(태조 2)에 17세의 나이로 별장(別將)에 임명되었고, 1402년(태종 2)에는 무과에 급제하였으며, 세종 때에는 왜구의 침입을 막는 데 큰 공을 세워 충청도 병마 도절제사로 임명되어 병선(兵船)을 만드는 일에도 힘쓰게 되었다.

이 때부터 그는 물리학자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여 무예를 닦으면서도 틈틈이 여러 기계장치의 원리를 생각하고 연구하였다. 특히 금속공예와 그 주조법에 조예가 있어 세종은 그를 공조참판으로 임명하여 새로운 청동활자인 경자자(庚子字)를 만드는 일에 힘쓰게 하였다.

경자자의 주조로 인쇄 능률은 많이 좋아졌으나, 좀더 아름다운 자체(字體)와 인쇄 능률을 높이기 위한 주조사업이 다시 시행되어, 마침내 1434년(세종 16)에 갑인자(甲寅字)의 완성을 보게 되었다. 20여만 개의 대소활자로 주조된 이 갑인자는 자체가 훌륭하고 선명할 뿐만 아니라, 큰 활자와 작은 활자를 필요에 따라 섞어서 조판할 수 있는 발전적인 것이었다. 갑인자의 인쇄로 조선의 활판인쇄기술은 일단 완성되었다.

그는 또한 서운관에서 정초(鄭招) · 장영실(蔣英實) · 김빈(金鑌) 등과 수년 동안 노력한 끝에 1437년에 대간의(大簡儀) · 소간의 · 앙부일구(仰釜日晷) · 현주일구(懸珠日晷) · 천평일구(天平日晷) · 정남일구(定南日晷) · 규표(圭表) 등의 해시계를 만들었고, 선기옥형(璿璣玉衡)이라고도 불리는 혼천의(渾天儀)를 제작하였다.

또한 그는 평안도 도절제사가 되어 평안도와 함경도 변방에 나타나는 야인(野人:만주족)들의 침략을 막고, 그들을 토벌할 때 여진족에게서 얻은 중국의 제철기술을 바탕으로 수철(水鐵:무쇠)을 연철(軟鐵)로 만드는 기술을 익혀 부족한 구리 대신에 쇠로써 대포를 만드는 등 화포의 개량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 밖에 병선 만드는 일에도 관심이 있어 갑조법(甲造法), 즉 판자와 판자를 이중으로 붙이는 방법의 시행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시호는 익양(翼襄)이다.

참고문헌

『한국과학기술사』(전상운, 정음사, 1976)
집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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