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장은 국가와 사회 발전에 공훈을 남긴 사람이 사망하였을 때 관련 단체가 중심이 되어 각계각층의 인물들과 함께 장례 위원회를 구성하여 거행하는 장례 의식이다. 일반적으로 빈소 운영, 영결식, 안장식 등의 절차로 진행되나 고인과 유족의 뜻에 따라 일부 변경하거나 생략하기도 한다. 일제강점기에는 추모를 통하여 조선 민족의 결집력을 보여 주는 장례로서 의미가 있었으며, 해방 후에는 고인과 관계된 사회단체나 저명인사를 주축으로 한 장례로서 거행되어 왔다. 오늘날에는 다양한 사회 분야의 추모와 결집을 위한 장례로서 기능을 하고 있다.
장례를 주관하는 주체에 따라 장례를 국가장, 기관장, 사회장, 가족장 등으로 구분할 때, 사회장은 국가나 가족이 아닌 사회단체 등이 주관하는 장례를 의미한다. 사회장은 국가장이나 기관장과 달리 법적 근거가 없는 사회 관습상의 장례로서, 관련 단체나 고인과 관계가 깊은 인물을 중심으로 구성된 장례 위원회가 고인의 유언 또는 유족의 희망에 따라 장례 절차와 의식, 방법 등을 결정하여 거행한다. 일반적으로 빈소 운영, 영결식, 안장식 등의 절차로 진행되나 고인이나 유족의 뜻에 따라 일부 변경하거나 생략하기도 한다. 과거에는 정부가 장례 보조금을 지원하는 등 사회장에 관여하기도 하였으나, 이에 대한 법적 근거가 없어 2004년부터 정부의 지원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사회장은 근대 사회에서 등장한 장례(葬禮) 의식이다. 현재까지 기록을 통해 확인되는 최초의 사회장은 1920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시기 상해 교민 사회가 주관한 동오(東吾) 안태국(安泰國)의 장례라 할 수 있다. 그 뒤 1922년 운양(雲養) 김윤식(金允植)이 사망했을 때 사회장이 시도된 바 있으나, 동아일보사와 민우회를 중심으로 한 민족주의 세력과 국내 공산주의 그룹 간의 정치 세력화를 둘러싼 찬반 대립으로 인해 김윤식의 사회장은 치러지지 못하였다. 이후 1925년 수해 이주민 구호 활동 중 사망한 사회주의자 전일(全一)의 사회장, 1926년 상해재류동포 주관으로 거행된 상해임시정부 전 국무총리 노백린(盧伯麟) 사회장 등이 기록을 통해 확인되며, 1927년에는 각계 사회단체 대표가 연합하여 주관한 월남(月南) 이상재(李商在) 사회장이 있었다. 해방 후에는 1948년 이동녕(李東寧), 차리석(車利錫), 조성환(曺成煥) 등 임시정부 요인이 사망하였을 때 애국 단체 연합 사회장이 거행되었다. 김병로(金炳魯)(1964년), 김활란(金活蘭)(1970년), 스코필드(Schofield, F.W)(1970년), 곽상훈(郭尙勳)(1980년) 등의 사회장과 박태준(朴泰俊) 전 국무총리 사회장(2011년),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의 부인이자 여성 지도자였던 이희호(李姬鎬) 여사 사회장(2019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회장이 있었다. 또한 민주화운동, 노동운동, 통일운동의 공적이 있거나 해당 분야의 중요한 사건과 관련된 인물이 사망하였을 때, 이를 기리는 다양한 형태의 사회장도 거행되었다. 시인 김남주(金南柱)(1994년), 리영희(李泳禧)(2010년), 이기택(李基澤)(2016), 한승헌(韓勝憲)(2022) 등의 민주 사회장, 전진한(錢鎭漢)(1972년), 문중원 기수(2020년) 등의 노동 사회장, 황장엽(黃長燁)(2010년), 박순경(朴淳敬)(2020년) 등의 통일 사회장이 이에 해당한다. 그 밖에 체육계가 주관한 손기정(孫基禎)(2002년)의 사회장, 문인계가 주관한 박경리(朴景利)(2008년)의 사회장과 같이 다양한 분야에서 각 단체와 저명인사들이 주축이 되어 주관하는 사회장도 있다.
사회장이 일반적인 가족장과 절차상 비교되는 차이점은 크게 두 가지이다. 첫째는 가족 이외에 관련 사회단체나 각계각층의 인물들을 중심으로 장례 위원회가 구성된다는 점이다. 관련된 사례로서 2011년 박태준 전 국무총리 사회장 때는 3인의 공동 위원장을 포함한 265명의 장례 위원회가 구성되었으며, 2019년 여성 지도자 이희호 여사 사회장 때는 공동 위원장 3인 포함 총 3,300명의 장례 위원회가 구성된 바 있다. 둘째는 가족이나 지인 외에 사회 각계의 인물들이 모여 고인을 추모하는 영결식이 장례 마지막 날 거행된다는 점이다. 박태준 사회장 때는 국립서울현충원 현충관에서 영결식이 거행되었으며, 이희호 사회장 때는 고인의 종교를 반영해 서울 창천교회에서 기독교 예배 의식으로 영결식(永訣式)이 진행된 바 있다.
일제강점기의 사회장은 국장 혹은 국민장이라는 용어의 사용이 어려운 식민 치하의 현실 속에서 추모를 통해 조선 민족의 결집력을 보여 주는 장례로서 의미가 있었다. 김윤식 사회장을 둘러싼 찬반 논쟁이나 동오 안태국, 월남 이상재 사회장의 규모 등을 고려한다면, 일제강점기의 사회장은 해방 후의 국민장과 같이 온 민족이 추모를 통해 결집하는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그러나 해방 후 삼열사 국민장(1946년)이나 김구(金九) 국민장(1949년) 등이 가능해지면서 사회장은 점차 고인과 관계된 사회단체나 저명인사 등을 주축으로 한 장례로 그 성격이 변화되었다. 오늘날에는 다양한 사회 분야의 인물에 대한 추모와 단쳬의 결집을 위한 장례로서의 기능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