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제도는 세종 때 처음 시작되었다. 중국으로부터 『무원록(無寃錄)』이라는 책이 들어오자 세종은 검시의 문안을 작성할 때는 반드시 그 예에 따르도록 조처하였다.
한편, 중국의 경우와 우리나라의 형편이 같지 못한 점을 고려하여, 『무원록』에 음주(音註)를 가하고 주해(註解)를 붙인 『신주무원록(新註無寃錄)』이 1438년(세종 20) 11월에 간행되어 그에 따른 검시 양식이 일반화되었다.
세종 이전의 우리 사회에서는 인명치사에 관한 재판에 있어 실증적인 검시를 소홀히 하였으나, 이 제도가 시행되면서부터는 사건에 대한 범인과 증인들의 추고(推考)나 심문만으로는 판결할 수 없고, 반드시 시체를 검시하여 판결하도록 하였다. 이 때문에 살상에 대한 재판은 그 공정성을 기하게 되었다.
시체를 부검하는 절차는 다음과 같다. 일단 살인사건이 발생하면 사체가 있는 곳의 지방관이 먼저 제1차 시체검험을 행한다. 이를 초검(初檢)이라 하며 초검관(初檢官)은 검안서(檢案書)를 『무원록』의 시상식(屍狀式)에 의하여 상부관청에 제출한다.
인근의 다른 지방관은 초검관으로부터 사건을 인수받아 복검(覆檢:두번째 부검)을 행한다. 초검관은 그의 검시내용을 복검관에게 누설해서는 안 되도록 규정되었다. 복검관의 독자적인 검안서도 역시 상부관청에 제출된다.
상부관에 제출된 초검·복검의 내용이 일치될 때는 이것으로 그 사건을 종결하게 되지만, 만약 두 검안의 내용이 일치되지 않을 때는 삼검이 실시된다. 삼검은 중앙과 지방에서 공동으로 실시하는데, 중앙에서는 형조의 낭관(郎官: 六曹의 5∼6품급 문관)이, 지방에서는 관찰사가 지명하는 차원(差員: 지방 관아의 관리)이 다시 세밀하게 시체를 검험한 뒤에 초검관·복검관들의 검안서를 참작하여 최후의 판결을 내리게 된다.
그래도 사건에 따른 의혹이 풀리지 않거나 피해 당사자들의 원성이 있을 경우 사검(四檢)·오사(五査)·육사(六査)를 거치거나, 또는 국왕에까지 직소하는 예도 있다.
『경국대전(經國大典)』의 예전조(禮典條)에는 율과(律科)의 초시(初試)와 복시(覆試)에 『무원록』이 필수과목으로 채택되어 있어, 살상검험(殺傷檢驗)의 재판에 관여하는 모든 형률관(刑律官)들이 삼검제도에 익숙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법의학적 재판방법을 형사재판에 채택한 것은 우리나라의 형사법제상 진일보의 발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