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면 7칸, 측면 3칸인 다포계(多包系) 단층 맞배지붕건물이다. 배흘림기둥 위에 창방(昌枋)과 평방(平枋)을 두르고, 이 위에 안팎 모두 1출목(一出目)인 간결한 포작(包作)을 짰다.
바깥두리기둥[外圓柱]에 교두형(翹頭形) 첨차를 놓고 공간포(空間包)를 짜올려 다포계 형식을 취한 반면, 내부 고주(高柱) 위에는 굽받침이 있는 곡주두(曲柱頭), 곡소로[曲小累], 단면이 쌍S자 모양인 첨차(檐遮) 등 주심포계 형식을 취하고 있어 고려 말기의 절충적인 특징을 지니고 있다.
외부로 나온 첨차의 쇠서[牛舌]는 끝 부분이 둔하게 잘려 있고 아래쪽으로 쳐져 있으며, 첨차에서와 같이 공안(空眼 : 건축물에서 구멍·총혈 등의 총칭)을 깊이 파내는 등 조선 초기의 특징을 보이고 있다.
보의 단면은 위가 굵고 아래가 가는 항아리 모양이며, 대들보와 마루보 사이, 마루도리 밑에는 파련(波蓮)을 새긴 부재와 포(包)를 섞어서 만든 대공(臺工)을 세웠다. 또 마루보 위에 ㅅ자 모양 대공을 두어 마루도리를 받치고 있어서 우리나라 목조건축 가운데 오래된 법식(法式)을 따른 귀중한 예이다.
한편, 일제침략기에 이 건물을 수리하면서 발견한 묵서명(墨書銘)에 의하면, 1327년(충숙왕 14)에 처음 지어 1530년(중종 25) 에 수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성불사 내의 극락전과 함께 한국 목조건축사 연구에 귀중한 사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