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정보(精甫), 호는 부용당(芙蓉堂). 성익동(成翼仝)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성윤(成胤)이고, 아버지는 참봉 성적(成績)이다. 어머니는 노사영(盧士英)의 딸이다. 정구(鄭逑)의 문인이다.
1591년(선조 24) 식년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홍문관정자(弘文館正字)로서 고향인 창녕에서 의병을 모집, 충의위(忠義衛) 성천희(成天禧), 유학(幼學) 곽찬(郭趲) 등과 함께 거병하여 약 1,000여 명을 거느리고 곽재우(郭再祐) 휘하에서 활약하였다.
예조좌랑(禮曹佐郎)을 거쳐 1597년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1598년 성균관사예(成均館司藝)에 이르렀다. 다시 영남조도사(嶺南調度使)가 되어 유성룡(柳成龍)으로부터 제세(濟世)의 재간이 있다는 찬사를 받았다. 그 뒤 사친(事親: 어버이를 모심)을 이유로 1600년 영해부사(寧海府使)로 나아가 4년 간 선정을 베풀었다.
아버지의 병 때문에 창녕에 돌아간 후 부모상을 연이어 당하였다. 복상을 마친 뒤 1607년 남원군수에 제수되고, 1612년(광해군 4)에는 광주목사(光州牧使)가 되었으나, 소송 처리를 소홀히 했다는 이유로 파직되었다. 이에 영천(榮川)으로 돌아가 13년 동안을 한거하면서 일사(逸士)와 교유하였다.
인조반정으로 성균관사성(成均館司成)이 되고, 다시 상의원(尙衣院)·봉상시(奉常寺)의 정(正)에 옮겼다가 이괄(李适)의 난 때 국왕을 공주로 호행하였다. 1624년(인조 2)에 제주목사를 제수받고, 1628년 우부승지에 임명되었지만 병을 핑계로 사양하였다.
후일 이조판서·양관대제학(兩館大提學)을 추증받고, 창녕의 연암서원(燕巖書院)·물계서원(勿溪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부용당선생일고(芙蓉堂先生逸稿)』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