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준구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후기에, 재령군수, 서천군수, 황해도관찰사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덕보(德甫)
장곡(藏谷)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574년(선조 7)
사망 연도
1633년(인조 11)
본관
창녕(昌寧)
주요 관직
청송부사|재령군수|서천군수|황해도관찰사
관련 사건
인조반정|이괄의 난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정의
조선 후기에, 재령군수, 서천군수, 황해도관찰사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덕보(德甫), 호는 장곡(藏谷). 이조참파 성윤(成倫)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황산도찰방(黃山道察訪) 성효관(成效寬)이고, 아버지는 부제학 성이문(成以文)이며, 어머니는 순창조씨(淳昌趙氏)로 감찰 조흔(趙昕)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599년(선조 32) 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세자시강원설서·병조좌랑·홍문관의 수찬·교리, 이조정랑·의정부사인·홍문관부응교 등을 역임하였다. 광해군이 즉위하자 이이첨(李爾瞻)의 배척으로 남해에 유배되었다가 이산(理山) 등지로 이배(移配)되어 16년간이나 귀양살이를 하였다.

인조반정 후 관직에 다시 나가 청송부사·재령군수·서천군수를 역임하였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부안에 우거하고 있다가 소식을 듣고 안산(安山)으로 달려가 그곳에서 사재를 털어 의병을 모집하였다.

난이 평정된 후 군자감정에 이어 선천부사가 되어 양서(兩西)의 관향사(管餉使) 및 찬획사(贊劃使)를 겸하였다. 정묘호란 때 기근이 심하자 기민의 진휼에 힘써 공적을 쌓았으며, 백성들이 청천강가에 송덕비를 세워 그 덕을 기렸다. 1631년 황해도관찰사를 지냈고 동지중추부사·장례원판결사를 거쳐 안동부사를 지냈다.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참고문헌

『선조실록(宣祖實錄)』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인조실록(仁祖實錄)』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국조방목(國朝榜目)』
『기언별집(記言別集)』
• 항목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