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덕보(德甫), 호는 장곡(藏谷). 이조참파 성윤(成倫)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황산도찰방(黃山道察訪) 성효관(成效寬)이고, 아버지는 부제학 성이문(成以文)이며, 어머니는 순창조씨(淳昌趙氏)로 감찰 조흔(趙昕)의 딸이다.
1599년(선조 32) 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세자시강원설서·병조좌랑·홍문관의 수찬·교리, 이조정랑·의정부사인·홍문관부응교 등을 역임하였다. 광해군이 즉위하자 이이첨(李爾瞻)의 배척으로 남해에 유배되었다가 이산(理山) 등지로 이배(移配)되어 16년간이나 귀양살이를 하였다.
인조반정 후 관직에 다시 나가 청송부사·재령군수·서천군수를 역임하였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부안에 우거하고 있다가 소식을 듣고 안산(安山)으로 달려가 그곳에서 사재를 털어 의병을 모집하였다.
난이 평정된 후 군자감정에 이어 선천부사가 되어 양서(兩西)의 관향사(管餉使) 및 찬획사(贊劃使)를 겸하였다. 정묘호란 때 기근이 심하자 기민의 진휼에 힘써 공적을 쌓았으며, 백성들이 청천강가에 송덕비를 세워 그 덕을 기렸다. 1631년 황해도관찰사를 지냈고 동지중추부사·장례원판결사를 거쳐 안동부사를 지냈다. 좌찬성에 추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