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여산(礪山). 자는 숙보(叔保), 호는 설촌(雪村). 아버지는 예조참의 송극인(宋克認)이며, 어머니는 첨정 김흡(金洽)의 딸이다.
1633년(인조 11) 사마시에 합격하여 헌릉참봉(獻陵參奉)·종묘서부봉사(宗廟署副奉事)·상서원부직장(尙瑞院副直長)·선공감감역(繕工監監役)·내자시주부(內資寺主簿)·사평(司評)·공조좌랑 등을 지냈다.
1653년(효종 4)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병조좌랑·사간원정언·고산찰방(高山察訪)·황해도사(黃海都事)·예조정랑 등을 거쳐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에 올라 세자시강원사서(世子侍講院司書)를 겸임하면서 송준길(宋浚吉)이 경연(經筵)에서 시강할 때 많은 보조를 하였다.
그 뒤 성균관사성(成均館司成)으로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청나라에 다녀온 뒤 밀양부사로 나아가 치적을 올렸으며, 1661년(현종 2) 이후 상의원(尙衣院)·사복시(司僕寺)·장악원(掌樂院)·봉상시(奉常寺)·군자감(軍資監)의 장을 거치면서 사간원헌납(司諫院獻納)·사헌부의 장령(掌令)·집의(執義), 사간원사간을 여러 번씩 역임하였다.
이 때 대각(臺閣)에 커다란 의론이 있을 때마다 반드시 참여하여 정론(正論)으로 시비를 가렸다. 1667년 동부승지가 되고 좌승지, 형조·공조의 참의를 거쳐 원주목사로 내려가 향교를 수축하고 늠희(廩餼: 쌀과 음식)를 지급하여 문운(文運)을 크게 일으켰으며, 흉년에는 요역(徭役)과 부역(賦役)을 덜어주어 민심을 회복시켰다.